2016년 6월 20일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인생은 또다시 바뀌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선배라는 존재가 생겼다는 점이다. 단순히 동료라고 묘사하기는 어렵다. 회사원과 달리 공과 사의 경계도 불분명한 관계다. 때로는 내 가족보다 통화를 자주 하는 사이다. 마음이 통하는 이는 좋은 형, 좋은 누나가 되어 주기도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훌륭한 기자를 만드는 역할도 있다. 물론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반대의 경우도 많다. 엄격한 위계서열에 따라 순종하길 강요하기도 한다. 우리도 누군가와 관계를 손쉽게 질리도록 만들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언론사는 요란하게 사람을 뽑지만, 그만큼 쉽게 쫓아내지도 않는다. 바꿔 말하면 선배와 누군가의 선배가 될 나는 평생을 함께 할 사이다. 그게 좋든 싫든 나란히 나아간다.
그토록 어렵게 손에 넣은 기자라는 이름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사람과 사람의 사이, 그 간극을 이해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무슨 일이라도 누구랑 함께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안타깝게도 나는 초년차부터 반면교사만 많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절대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나는 사람의 됨됨이를 쉽게 재단하곤 했다. 언론사는 모두가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엘리트 집단이지만, 결국엔 이기심을 드러낼 줄 아는 회사원들이 모인 이익 집단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나는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아직 거듭나지 못한 풋내기였지만 사람의 그릇은 금방 알아차렸다고 믿었다. 자신에게 작은 해를 끼치는 사소한 불편조차 견디지 못하는 누군가는 금방 밑천을 드러냈다. 늘 불안한 그들은 어느 후배에게도 초라한 사람들이었다. 무심코 던진 말의 책임을 주워 담지 못하면서, 보잘것없는 자존심으로 타인에게 야만스런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범인들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연차가 쌓일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한번 어긋난 고집은 고쳐 쓰지 못할 신념이 된다. 그리고 아직은 까마득한 후배로 취급받는 나도 그렇게 변하겠지. 이런 상상을 하니 몸서리칠 정도로 무서웠다.
나는 과연 좋은 선배가 될 수 있을까. 후배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려면 내가 거인처럼 서있어야 하는데. 불안감을 드러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수년 전 군대에서 부조리를 고발했다가 순식간에 관심병사가 된 적이 있다. 그날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이등병들이 잠을 자는 생활관 문을 열고 선임들이 욕을 퍼부었다. 모든 이들이 등 뒤에서 수군거렸고, 대놓고 소리를 지르는 병사들도 있었다. 막내인 동기들은 나를 진심으로 응원한다며 용기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부 고발자라는 책임에서 비껴가 있었다. 감히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한 대가는 쓰라렸다. 나는 알 수 없는 외계 공간에 나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때 나는 먼저 싸움을 시작할 배짱도 없었다. 아무 곳이나 도망치고 싶었다. 차라리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다. 그렇게 누구 하나 내 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 선임이 생활관에 들어왔다. 꽁꽁 얼어붙은 팥빙수 아이스크림과 서울우유 한 팩을 들고서.
그는 나를 찾아온 이전의 모든 이들과 다른 말을 꺼냈다.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그의 말을 귀에서 흘릴 준비를 잔뜩 했다. “힘들지. 내가 너의 편이 되어 줄게. 조금만 더 참아줘” 의심이 많은 나는 그때까지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한아름 들고 온 간식을 손에 쥐어주었다. "팥빙수에 이걸 넣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아니? 너희도 한번 넣어서 먹어봐. 꼭 밖에서 먹는 것 같은 맛이 난다니깐. 내가 있으니깐 괜찮아" 그건 특별할 것 없는 군것질 거리였을 뿐인데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의 배려는 군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훈훈한 선후임 관계에 그치지 않았다. 며칠 뒤 부대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형식적인 간담회를 열었을 때에도 그는 유일하게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 내 편을 들어 막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 후로 내 군생활이 한동안 편해진 건 아니었다. 다만 머지않아 결국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크고 작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선임은 나보다 먼저 전역을 했었지. 그리고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전역일은 찾아왔다. 사회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팥빙수 아이스크림만큼은 입에 대지 않았다. 남자들이 술자리면 자랑스럽게 꺼낸다는 군대 얘기도 거의 하지 않는다. 다만 내게 군생활의 정말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그날을 생활관에 걸터앉아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꼽겠다. 그건 내게 진짜 선배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경험이었다. 그건 당신이 옳고 그르건, 나는 무조건 당신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뜨거운 위로였다.
내가 되고 싶은 존재, 내가 되지 않고 싶은 존재. 그 간극은 내 인생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릴 때마다 떠올리는 기준이 된다. 수년 째 언론사 입사시험에 낙방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위로를 건넨다. 많이 아프고, 울고 싶을 테지. 그건 너의 잘못이 아냐. 너는 틀리지 않았어. 그날 내가 먹었던 팥빙수 아이스크림처럼 위로를 건넨다. 당신의 싸움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우리의 삶은 수백 번, 수천번 실패를 거듭하며 나아간다. 휘청거리고 비틀거리고. 때로는 주저앉고 무너지기도 한다. 꼿꼿이 똑바로 걸어야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지구가 일직선이 아닌 포물선을 그리면서 한 해를 날아가듯이. 그 사이 경험하는 계절의 풍경은 수없이 바뀌지 않던가.
최근에는 나도 천 길 낭떠러지에 다다른 느낌을 받는다. 다행히 나는 존재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인간적인 선배들을 만났고, 기자라는 직업을 아직까지는 해도 좋다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닮고자 노력한다. 이제 막 어렵게 관문을 통과한 후배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도 그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최선을 다했고, 치열하게 노력했을 테니. 난 그들에게서 오랜 방황을 거친 내 모습을 읽는다. 그 마음 가짐만은 변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야겠다. 그리고 당신이 언제나 온몸으로 부딪히는 이 길을 진심으로 응원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 서로를 그렇게만 닮아갔으면 좋겠다. 실력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닮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언제나 어디서나,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