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7일
"그러니까 나는 1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그녀가 말했다. 아침부터 취업 준비를 빙자해 만났던 우리들은 이미 여러 차수를 옮긴 뒤였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신촌 거리에는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밝혀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노포들이 오래된 거리를 지키고 있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학교를 졸업한 그녀가 학창 시절 단골집이라며 우리를 이끌었다. 술잔을 채운 그녀가 꺼낸 말 한마디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우리는 모두 아직 학생이었지만 아니기도 했다. 졸업한 시기는 달랐지만 모두 몇 년 전 일이다. 다만 몸은 여전히 대학가에 묶여 있었다. 우리는 이 스터디 모임이 '술터디'가 되지 말자고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는 일이 손에 꼽았다. 이 바닥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질병이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변덕스러운 감정선 때문이다. 매일 줄타기를 하듯이 아슬아슬했다. 언제나 동병상련과 자기혐오의 언저리를 오가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도 누구 하나 술자리를 떠나진 않았다. 의지하고 싶어서, 푸념을 털어놓기 위해서, 때로는 변명처럼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서.
그날도 누구 하나 울지 않았다. 또다시 전해진 낙방 소식은 술잔을 기울여야 할 이유였을 뿐. 우리는 일단 어설픈 위로를 건넨다. 모두가 익숙한 일이었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친구를 본 적이 없어".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최면을 걸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망망대해에 떠내려가면서 그랬다. 막막한 외로움과 두려움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아니, 그래서 누군가에게 드러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잘 지켜온 규칙이 만든 작은 평화다.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장님들 중에서 ‘방 안의 코끼리’를 먼저 끄집어냈다.
“내가 지금보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소용이 없다는 거지” 그녀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항상 즐겨 찾던 빨간색 두꺼비가 그려진 소주를 가득 채웠다. 무거운 공기가 짓누른다. 그녀의 무너진 자존감은 입에 발린 위로마저 거부했다. 거기엔 이런 사연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얼마 전에 자신이 참석했던 한 '선배와의 대화'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던 회사에 잠깐 몸 담았던 한 기자의 이야기였다. 거기서 늘어놓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 선배는 미래의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요새 여학생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지? 네가 XX여대 출신이라면, 넌 그들 안에서 경쟁해야 하는 거다. 남자 애들이랑은 또 달라. 그들 중에서 네가 안정권으로 합격하려면, 필기라도 1등을 하지 않는 이상 안 된다"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저주는 나를 옭아맸다. 사실 이런 술자리의 화제는 뻔하다. TV 속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 최신 유행하는 음악, 그리고 연애 이야기. 모든 게 안주거리다. 그러다 보면 늘 돌아오게 되는 곳이 있다. 입사 시험 이야기. 내가 유독 말수가 적어지는 순간이다. 왜냐면 나는 가장 간단한 필기시험조차 통과해본 적이 없었으니깐. 그 시절 나는 구멍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고 배우거나 따라 할 생각조차 못했다. 나는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친구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선망의 대상으로 느낄 뿐이었다. 그날도 나는 비겁하게 침묵을 지켰었다. 어설픈 위로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넓지 않았다.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옹졸한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건, 내가 조금 더 성숙해진 나중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남몰래 얼마나 울었을까. 자신이 넘을 수도, 부술 수도 없는 벽에 갇혀있는 느낌은 어땠을까. 단순히 운명론이나 불가항력이라 넘길 수 없었을 테다. 그건 참을 수 없는 고문이 아니었겠는가. 더 믿기 힘든 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과장하는 그 선배의 방식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선한 의도도 숨어 있지 않다. 분명 냉정한 조언이나 격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유리천장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거. 남자아이들과 나는 경쟁 무대 자체가 다른 거야” 그녀는 읊조렸고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다. 나같이 둔감한 사람도 그런 역차별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천장을 깨기 위해 필사로 노력한다. 온몸이 깨지는 아픔을 그 사람은 얼마나 알까. 그렇게 함부로 말할 일 인가라고 의아했다.
나는 그 후로 종종 우리가 남에게 조언이라는 탈을 쓰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 생각했다. ‘바른말이 쓰다’는 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칼보다 날카로운 말은 우리의 영혼에 깊은 흉터를 남긴다. 그 시절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은 간단했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냥 작은 위로 하나면 됐을 텐데. 나는 친구 또는 선배라는 우위로 얼마나 남을 울렸던 가. 혹여나는 어깨를 빌려주어야 할 대상을 매몰차게 걷어찬 적은 없었을까. 어쭙잖은 경험과 짧은 배움으로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살면서 그런 식으로 무심코 내뱉은 말들은 어디쯤 남아있을까. “너희는 아직 멀었다. 죽을 만큼 해야 한다”. 내가 함부로 휘두른 말은 몇 번이고 나를 베며 쫓아다녔다. 어쩌면 그 시절 내가 가장 미워했던 꼰대의 모습부터 닮아 버린 것 같아서 아직도 후회만 남는다.
나는 지금도 그들처럼 글을 쓸 자신은 없다. 그리고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입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자는 회사를 떠났다. 나는 짧은 시간 겹쳤던 그를 마주하면서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난 그녀가 꼭 1등을 해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 선배의 결말을 놓고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 같은 자연법칙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런 태도야말로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 울타리를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수많은 합격생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최선의 해법을 알고 스스로 증명해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저 묵묵히 자신을 믿고, 믿는 사람들을 믿었을 뿐이다. 비웃거나 가로막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나간 거다. 그건 아주 느리고, 아주 오랜 여정이었다.
지금도 신촌의 어느 골목을 지나면 그날이 떠오른다. 낮부터 취해있던 우리는 늘 마지막 차수로 새벽을 그곳에서 맞았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그 시절 우리는 꼭 그런 칠혹 같은 어둠 속에 있었나 보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술집의 이름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대표곡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 우정, 취업에 슬퍼했던 그 시기를 견뎌낼 수 있도록 음악으로 위로를 건네었던 가수. 스무 살 우리와 같은 감정을 겪었던 그의 노랫말은, 앞으로 꼭 닮은 미래 세대에게도 같은 울림으로 전해질 테지. 그 위태로운 시기를 피할 수 없는 건 슬픈 일이지만, 느릿느릿 빛나는 희망을 품고 노래는 이어진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