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01
수컷의 생식세포는 암컷에 비해 매우 작고 그 수가 많다. 이는 동식물 어느 것에나 마찬가지다. 난자가 현미경에서 볼 수 있는 크기밖에 안 되는 사람의 경우에도 난자는 정자보다 훨씬 크다. 또한 양분의 양에서도 난자의 기여도가 훨씬 크다.
실제로 정자의 기여는 전혀 없고 정자는 유전자를 난자로 운반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따라서 정자와 난자의 경우 유전자에 대한 기여도는 같지만, 자식에 대한 투자한 자원량은 난자가 훨씬 많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으므로 수컷은 매일 수백만 개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수컷이 잠재적으로 여러 마리의 암컷을 이용하여 단기간 내에 많은 수의 새끼를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개개의 배아가 어미로부터 충분한 양분을 받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때문에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수컷의 암컷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의 관점에서 수컷과 암컷은 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서 서로 동의한다. 이들이 일치하지 않는 점은 자식들 각각의 양육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는 것이다. 어느 개체든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자식이 생존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트너에게 자식의 양육을 떠넘기고 자신은 다른 파트너와 새로운 자식을 갖는 것이 가장 현명한 전략이다. 이 전략은 암수 누구한테나 바람직한 것이지만 암컷이 이 전략을 구사하기는 수컷에 비해 어렵다. 암컷은 크고 영양소가 풍부한 난자의 형태로 처음부터 수컷보다 많은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수태할 때부터 이미 수컷보다 더 깊은 '정성'을 쏟는다.
자기 자식이 죽을 경우 어미는 아비보다 더 많은 것을 잃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장례에 새로운 자식을 죽은 자식과 같은 단계까지 키우려면 어미는 아비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여야 한다. 따라서 부모가 아직 어린 자식을 버릴 경우, 버리는 것은 어미가 아니라 아비일 확률이 높다.
물론 아비가 근면하고 충실하게 자식을 돌보는 종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자식에 대한 투자를 조금 줄이고 다른 암컷과 더 많은 자식을 만들게 하는 진화적 압력이 수컷에게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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