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국, 행복의 기원 02
3.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행복이라는 감정은 생존에 어떤 도움을 줄까? 다시 말해 인간은 왜, 또 무엇을 위해 행복감을 느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은 생존 확률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고, 행복은 이 청사진 안에서 아주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개에게 새우깡의 힘을 빌려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개에게서 단계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 우선 개가 물가로 오면 새우깡을 주고, 그다음엔 물에 발을 담그면 준다. 여기까지 숙련되면 개가 서핑보드에 올라와야 새우깡을 주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준다. 사람들은 이 같은 '조형'이라는 원리를 이용해 비둘기가 탁구를 치고, 개가 피아노를 치게 만든다.
결국 개는 서핑을 하게 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새우깡의 절대적 역할이다. 이렇게 특정 반응을 증강시키는 자극을 심리학에서는 '강화물'이라고 부른다. 새우깡이라는 이 강력한 강화물이 없다면 개의 서핑 묘기는 탄생할 수 없다.
행복의 본질은 개에게 서핑을 하도록 만드는 새우깡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서핑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점이다. 서핑과 생존. 차원이 다른 두 목표지만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하다. 개 주인이 사용한 수단은 새우깡이었다.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먹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하여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멋 옛날 호모사피엔스 중 일부만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목숨 걸고 사냥을 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짝짓기에 힘쓴 자들이다. 무엇을 위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자아성취? 아니다. 고기를 씹을 때. 이성과 살이 닿을 때. 한마디로 느낌이 완전 '굿'이었기 때문이다.
행복감을 인간이 왜 느낄까? 라는 질문의 답은 "생존, 그리고 번식" 이다.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바닷가에서 동전을 찾기 위한 도구인 동전탐지기를 생각해 보자. 동전탐지기의 원리는 간단하다. 탐지기에 달린 긴 쇠막대가 금속에 가까워지면 헤드폰에서 삐~ 하고 신호가 울린다. 여기서 좀 더 황당한 상상을 더해 보자. 어떤 동전탐지기에서 '삐'라는 신호음 대신 중독성 있는 음악을 들려준다고 하자. 혹시 이런 경우 동전을 찾게 해주는 신호(음악) 자체에 매료되는 사람은 없을까?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탐지기 주인이 자기의 원래 목적(동전) 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신호(쾌감)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 말이다. 행복을 좇는 우리 모습이 어쩌면 이 같은 주객전도의 상황과 비슷하다.
쥐의 학습행동 연구에 따르면, 실수로 쥐 뇌의 시상하부를 미세한 전극으로 자극했는데, 이후 쥐들은 이 자극을 받았던 장소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연구자들이 분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쥐들이 되돌아가려는 그 장소에서 뇌의 '쾌감센터'가 우연히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후 스스로 쾌감센터를 자극할 수 있는 지렛대를 만들어 주고 쥐의 행동을 관찰했다. 자위적인 쾌감을 느끼기 위해 쥐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지렛대를 두드렸다.
모든 동물의 뇌가 가진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쾌 혹은 불쾌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구분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는 세세한 감정중 쾌에 해당하는 것을 묶어 '긍정적 정서'라고 한다. 반대로 불쾌에 해당하는 여러 감정을 묶어 '부정적 정서'라고 부른다. 문화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감정은 쾌 혹은 불쾌의 두 바구니 중 하나에 반드시 담긴다.
행복의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비옥하지만 가보지 않은 낯선 땅, 매력적인 이성, 절벽에 붙어 있는 꿀이 가득한 벌집. 지금 당장 손에 쥐지 못한다고 실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는 이런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두렵지만 길을 나서야 하고, 고단하지만 열 번을 찍어봐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의욕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 노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보상이 필요하다. 희열, 성취감, 뿌듯한, 자신감. 이런 치명적 매력을 가진 경험을 한번 맛보면 또다시 경험하고 싶어 진다.
간단히 요약하면, 쾌와 불쾌의 감정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려주는 '생존 신호등'이다. 불쾌의 감정은 해로운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빨간 신호등'이고, 쾌의 감정은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나 생각을 할 때 그 일에 계속 매진하라고 알리는 '파란 신호등'이다.
그렇다면 뇌가 꾸준히 찾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뇌의 유일한 관심사는 생존이라는 점이 결정적 힌트다. 행복 전구는 언제 켜질까?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낄까?
5. 결국은 사람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고통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별, 짝사랑... 인간을 시름시름 앓게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기쁨 또한 사람을 통해 온다. 사랑이 싹틀 때, 오랜 이별 뒤의 만남, 칭찬과 인정... 그래서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간이 치르는 가장 성대한 의식들은 사람과의 만남(결혼, 탄생) 혹은 이별(장례)을 위함인 것이다.
왜 이토록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시카고 대학의 카시오포 교수팀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의 가장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동료의 존재는 식량 확보라는 생존 과제 해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이다. 사냥을 나가서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동료라는 '비상 식량 장치'가 부족한 경우-집단에서 소외된 경우- 결국 이것은 죽음으로 연결된다.
짝짓기라는 궁극적인 생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타인이 필요한다. 포유류는 자기 혼자 유전자를 남길 수 없다. 아무리 사냥을 잘해도 짝짓기 상대가 없는 동물은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
미국 다트머트 대학의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일평생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 그는 인간이 '뼛속까지 사회적이다. Social to the core'라는 표현을 썼다. 남을 설득하고, 속이고, 속마음을 이해하고... 뇌의 최우선적 과제는 사람 간의 이러 복잡 미묘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급격히 커진 시기는 함께 생활하던 집단의 크기가 팽창할 때와 맞물려 있다. 약 10명의 소규모 집단생활을 하던 인간이 정글을 나와 초원 생활을 하며 집단의 크기가 약 150명 정도로 커졌다. 낯선 이들과의 교류가 증가했고, 이들이 마음속에 숨진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게 됐다. 인간의 뇌를 성장시킨 기폭제는 타인의 존재였다는 것이 최근 널리 각광받는 던바 교수의 '사회적 뇌 가설 Social brain hypothesis'의 핵심이다.
우리는 사회적 인간의 유전자를 받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생존 비법'을 전수받았다. 이 '생존 비법 패키지'를 뜯어보면 두 가지 중요한 내용물이 나온다.
하나는 '고통'이라는 경험이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는 동물은 오래 살 수 없다. 다리에 박힌 못이 아프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생존에 위험이 되는 작은 불씨를 미리 끄는 일종의 호루라기 소리가 고통이다. 고통의 정확한 진원지는 다리가 아니라 뇌다. 못이 박힌 순간, 뇌의 전방대상피질이라는 부위가 활성화되고, 이것이 고통이라는 신호로 바뀐다.
다리가 잘려나가는 것만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었다. 이때 뇌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기제를 사용해 그 위협을 우리에게 알렸다. 외로움, 배신감, 이별의 아픔.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신호가 보일 때 뇌는 이런 마음의 아픔을 느끼도록 했고, 덕분에 더 치명적인 고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손가락이 잘릴 때와 애인이 떠날 때의 고통, 어느 쪽이 더 심할까? 뇌 영상 사진을 보면 신체적/사회적 고통은 모두 동일한 뇌 부위에서 발생한다. 손이 잘리든, 애인이 떠나든 뇌는 똑같은 곳에서 비상경보를 발동한다. 둘 다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심리학자 네이든 드왈은 대학생 62명을 모집해 그들이 느낀 사회적 고통의 정도를 21일 동안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 그룹은 매일 타이레놀을 2알 복용했고, 다른 그룹은 아무런 약효가 없는 흰 알약을 복용하도록 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매일 타이레놀을 복용한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의 사회적 상처를 덜 느꼈다.
우리 조상이 물려준 생존 패키지의 두 번째 내용물은 우리의 관심사인 '쾌감'이다. 고통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이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면, 긍정적인 정서의 기능은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는 이유는 먹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냥꾼은 눈앞에 토끼가 나타날 때, 토끼 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갈 때, 한 입 뜯어먹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깨알 같은 쾌감들을 흠뻑 느껴야 또 사냥을 나가게 되고, 이렇게 꾸준히 사녕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확보해야 했던 또 하나의 절대적 자원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사람'이다. 먹는 쾌감을 느껴야 음식을 찾듯, 사람이라는 절대적 생존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아주 좋아해야 한다. 타인을 소 닭 보듯 바라보는 사람에게 친구나 연인이 생길 리 없다. 이러한 '사회적 영양실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성한 '사회적 식욕'을 갖는 것이다.
초고속 승진의 기쁨. 뇌의 행복 전구가 켜지는 이유는 승진 자체가 아니라 승진이 가져다주는 사람들의 축하와 인정 때문이다. 자랑할 사람도 축하해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책상 위 화분과 단둘이 가지는 승진파티가 기쁘겠는가?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한 발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지난 30년간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행복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도 확고한 결론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은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느 성격 특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