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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선장수 Sep 25. 2018

행복 : 과연 행복이란 게 뭘까?

서은국, 행복의 기원  01


스스로 잘살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오다, 어느 날 문득 나를 돌아보니... 과연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알랭드 보통이 말하는 일과 사랑이라는 현대인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구심점에서 사십 대 중반이 된 나에게 주어진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항상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안정된 연봉의 직장생활도 자의반 타의반 뛰쳐나와 시작한 개업이라는 난관에 부딪혀 허덕거리고 있었으며, '행복'이 무언지도 제대로 몰랐으면서 '서로 행복한 삶을 살자'를 외치며 가정을 뛰쳐나와 중년의 홀아비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는 상황에서, 앞으로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었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반증이 필요 없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행복이 뭔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것인지? 그 자체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란 책을 만났다. 나의 행복 연구에 있어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책으로 나 자신의 학습과 다른 이들에 대한 책 소개를 겸하며 몇 편에 나누어 이 책을 정리해 본다.



1. 행복은 생각인가?

세상의 많은 책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의미를 찾아라', '가진 것에 만족해라', '긍정적인 생각을 해라' 같은 조언을 한다. 즉, 생각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맞는 말 같지만 이렇게 행복을 '생각'으로 치부해 버리면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을 고치라고 조언하고 있다. 


사람들은 의식적 사고(생각)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 중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보이는 부분(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실제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레몬향을 맡으면 인간의 뇌는 청결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세척제에 레몬향이 들어 있는 이유는 이러한 무의식을 겨냥한 제품화의 전형이다. 레몬차를 마시던 엄마가 갑자기 걸레를 찾는다고 하자. 딸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엄마는 의식 수준에 떠오르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댄다. "저녁에 오시는 손님이 먼지 알레르기가 있으시대" 절대 레몬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이유를 엄마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고 오해를 하면, 행복이라는 문제도 생각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 논하게 된다. 결국 행복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우리의 본능적 모습을 힘센 '말'이라고 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이성을 말 위에 올라탄 '기수'라고 가정해 보자. 야생의 말들이 생존을 목표로 달릴 때 기수가 탄 말이 혼자 달리는 말보다 반드시 더 유리할까? 혹시 기수가 도리어 방해되는 경우는 없을까?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모습도 아니고, 그 역할이 생각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의식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생각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항상 좌우한다고 착각하고 만다. 미리 말하지만, 행복은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인 감정의 경험' 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인간은 100% 동물이다

호모사피엔스가 문명인의 모습으로 산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 잠깐이다.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문명을 가진 것은 길게 잡아야 6천 년 전부터다. 인간과 침팬지가 진화의 여정에서 갈라진 것은 대략 60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시간을 1년으로 압축한다면, 인간이 문명생활을 한 시간은 365일 중 고작 2시간 정도다. 나머지 364일 22시간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사냥, 그리고 짝짓기에만 전념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1년 중 고작 2시간에 불과한 문명사회에 익숙해져 있지만, 우리 몸에 있는 유전자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100% 동물적 본능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600만 년간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 버릇들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여전히 100% 동물이다. 우리의 동물스러움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연구들이 있다. 그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여대생들의 임신 확률이 높은 가임기와 그렇지 않은 기간의 통화내역을 비교해 보면 딱 한 사람과의 통화 패턴이 달라진다. 바로 그녀들의 아버지였다. 가임기에 가까워지면 아버지를 경계하라는 경고 시스템이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 남자들에게 도시행인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자 대비 남자의 숫자가 많은 사진을 보여주면 남자 참가자들은 갑자기 원시인으로 변한다. 여자가 희소하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성적인 경쟁심을 발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데이트 예산으로 잡는다. 


비슷한 연구결과로 미국의 66개 도시의 소비행태를 분석해 보면,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사는 곳일수록 남자들의 과소비가 심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짝짓기 경쟁이 심할수록 무리한 지출을 해서라도 이성을 유혹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남자가 넘치는 도시일수록 남자들의 카드빚과 부채율이 높다.


즉, 인간의 행태를 연구한 다양한 결과를 둘러보면, 동물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유전자적 본능과 100% 동일한 내용을 따른다. 그러므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우리 인간도 이러한 동물적 본능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3.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은 목적론이다. 그에게 삶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때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이라고 보았다. 아침식사는 출근하기 위해, 출근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인간 행위의 종착지는 결국 행복이라는 것이다. 일상의 일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 혹은 수단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한 철학자의 견해일 뿐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누군가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인간은 더 똑똑해지기를 위해 살아온 것도 아니다. 물리적 법칙과 화학반응들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 우주이고, 생명이고, 인간이다. 그 과정에는 어떠한 목적도 이유도 없다. 인간은 수천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시계보다 더 복잡한 존재지만, 이런 우연과 환경적 선택의 과정을 거치면 아무리 복잡한 시계도 장대한 계획이나 포부가 없는 '눈먼 시계공'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진화생물학자들의 설명이다. 


인간이 우주의 특별한 존재라는 오만에 지동설이 한 방을 날렸다면, 여기에 KO 펀지를 날린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인간은 우주뿐 아니라 지구에서 조차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준 것이다. 자연법칙에 따라 존재하게 된 하나의 생명체. 인간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한 철학자의 견해일 뿐이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다양한 학문적 연구와 과학적 방법들로 지속적으로 검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행복이라는 명제를 어디에 대입시켜 논하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결론이 나온다.


과거 대부분의 행복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선택해 왔다. 이러한 행복론은 다분히 목적론적이고 가치지향적이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어야 하며, 이것은 의미 있는 삶을 통하여 구현된다는 식의 생각. 즉, '도덕책 버전'의 행복론이다.


수천 년 간 걸쳐왔던 철학의 옷을 벗겨내고, 좀 더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자. 즉, '과학책 버전'의 행복론을 말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하면, '동물의 모든 특성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 진화해 왔다'는 말이다. 조금 더 확대해서 말해보면 인간의 마음이란 것도 진화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피카소는 캔버스에 바흐는 악보에 생을 바쳤지만, 이런 행위는 동물이 생존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악보가 사자와 추위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행위는 본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상당 부분은 짝짓기를 위함에 있는 것이 최근 진화심리학자들의 견해이다.


피카소의 생애를 보면 답이 나온다. 그는 한결같은 꾸준함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붓을 한참 내려놓고 있다가 갑자기 예술적 창의력이 폭발하곤 했다. 이 광적인 시기는 그의 삶에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는 시점과 일치한다. 


한 연구에서 남학생들에게 만화 한 장면을 보여주고, 그 밑에 최대한 재미있는 캡션을 붙이도록 했다. 동기유발을 위해 한 그룹에는 재미있을수록 더 큰 상금을 주겠다고 하고(돈 조건). 다른 한 그룹에는 그냥 멋진 여인과 해변을 걷는 상상만을 하게 했다(연애 조건) 결과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연애 조건에서 나온 생각들이 더욱 재미있는 것이 나왔다. 심리학자들이 이 현상에 붙인 이름이 바로 '피카소 효과, Picasso Effect'이다.


피카소는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다. 보다 진화론적인 해석은 피카소라는 한 생명체가 그의 본질적인 목적(유전자를 남기는 일)을 위해 창의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행복'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행복감 또한 마음의 산물이다. 창의력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생존을 위한 중요한 쓰임새가 있는 것인 아닐까? 행복이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은 철학자들의 의견이었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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