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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선장수 Sep 21. 2018

좋은이별 : 상실에 대처하는 방법

김형경, 좋은 이별 01


김형경 작가의 좋은 이별이란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랑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들이 초반부부터 진지하게 논의되지만 이 책의 주제는 사랑이 아닌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도 잘해야 하지만, 이별 또한 잘하지 못하면 다음 사랑도 잘할 수 없을뿐더러 경우에 따라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으니, 이별에 대하여도 직시하고 "좋은"이별이 되도록 지나간 상실에 대하여 제대로 애도하는 방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책 내용 중에 여성보다 남성이 자신의 애완동물을 떠나보낸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여성의 경우 이별에 나름 대처를 잘 하는 경향이 있어서 과거의 경험(자신의 강아지의 죽음)을 굳이 타인들에게 늘어놓지 않아도 이미 치유가 된 경우가 많은데, 남성은 그렇지 못하다 보니 자신의 강아지의 죽음에 대하여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넋두리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란 얘기이다.


대개의 경우 남성의 이러한 경험(자신의 강아지의 죽음)은 다른 중요한 무엇-예를 들어 부모의 상실, 애정결핍 등-에 대한 상징적인 경험으로 그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것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살아오면서 발생한 상실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상처의 상징적 표출이 강아지의 죽음으로 대변된다는 말이다.




1. 스타스키와 허치 이야기


내가 어렸을 때(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유치원생이었거나 국민학교 저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우리 집은 제법 큰 식당을 하고 있었다. 식육점과 함께하는 식당이었으니 주메뉴가 불고기, 삼겹살 이런 것들이었다. 식당의 뒤쪽으로 가면 주방이 있었고, 그 뒤 쪽문을 나가면 아주 큰 마당이 있었다. 마당이라고 해 봐야 잘 정돈된 정원이랄 건 아니고, 그냥 주변 다른 집과 왕래가 되지 않도록 콘크리트 벽을 둘러쌓은 황량한 공터라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 공터에서 우리는 스타스키와 허치라는 강아지 두 녀석을 키웠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를 따라 석대 장터(부산에 있는 오일장, 아직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에 갔다가, 내 눈과 마주친 똘망똘망한 강아지 두 녀석을 만났다. 어찌나 귀엽던지 그날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버지를 졸라 두 마리를 모두 사서 아버지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느낌도 아직 생각난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그 당시 재밌게 보던 TV 외화시리즈의 주인공 이름인 스타스키와 허치라는 이름을 두 녀석에 지어주었다. 스타스키와 허치는 나와 꽤 궁합이 잘 맞아 항상 잘 놀았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본가에 있는 예전 앨범을 보면 두 녀석과 찍은 사진이 간혹 보이곤 하니, 어린 시절 한켠을 장식하고 있는 소중한 추억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인지 유치원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떤 곳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스타스키와 허치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로는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나와 형님은 그때부터 동네를 구석구석 뒤져가며 스타스키와 허치를 불렀고, 날이 저물어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두 녀석을 발견하지 못했다. 형님과 나는 허망한 상실감에 묻혀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우리 집 앞(식당 앞)에 뻘건 깃발 같은 것이 펄럭였다. 나는 그때 그 깃발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그 깃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었다.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그 깃발의 의미를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형님은 나보다 6살이나 많았으니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그 시절 고깃집들은 여름이 되면 평소에 메뉴에 없던 냉면 같은 계절메뉴를 추가하였고, 그런 계절메뉴의 홍보를 위해서 식당 앞에 빨간 홍보깃발을 걸곤 했다. 요즘도 그런 집이 가끔 보이곤 한다. 그런데 우리 집에 걸려있던 그 깃발의 계절메뉴는 냉면이 아니었다. 바로 "보신탕 개시"라는 글귀가 그때 우리 집 앞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스타스키와 허치를 잃어버리고 난 슬픔에 대하여는 정확히 기억에 나질 않는다. 그날 저녁까지 동네를 헤매고 다닌 기억과 집 앞에서 뻘겋게 펄럭이던 깃발에 대한 기억 외에 더 이상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실제 그 어린 나의 감성에는 아주 큰 충격이었을 것이겠지만 나는 스타스키와 허치를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




2. 대박이 이야기


시간이 무수히 흘러 나는 성인이 되었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게 되었다(물론 지금은 이혼도 해서 홀아비로 산다). 큰애가 7살, 둘째가 6살이 될 무렵 나는 아이들에게 강아지를 키우는 즐거움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솔직히 아이들의 정서문제는 핑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강아지를 기르고 싶은 욕심이 더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생일선물로 무엇을 원하냐는 애들 엄마의 말에 나는 강아지 한 녀석을 데려오자고 요청을 했고, 금연을 시작할 것과 강아지 목욕 당번을 내가 맡을 것이라는 다짐을 더하고 나서야, 우리 가족은 애견샵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 어린 시절 스타스키와 허치를 만났을 때 보았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느낌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는지,  아이들이 먼저 그 녀석을 안고 집으로 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그날 우리 집으로 왔고, 애들 엄마의 먹고사니즘적인 성향에 못 이겨 이름이 "대박이"이가 되어버렸다.


대박이는 형언할 수 없는 귀여움과 애교로 무장해서 아이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잠을 잘 땐 서로 데려가려 해서 순서를 정해야 했고, 산책을 나갈 때도 리드 줄을 잡는 순서를 공평하게 정하지 않으면 큰애가 울던 작은애가 울던 사단이 나게 될 정도였다. 대박이는 그렇게 우리 집의 막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대박이가 집에 온 지 2달 정도 되었을 무렵, 애들 엄마의 친구들끼리 가까운 부산 근교의 나들이 공원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그 공원은 상당히 넓은 잔디밭이 있는 곳 인터라 우리는 당연히 대박이를 데려갔다. 공원 입구에서 입장료(사설공원이었다)를 받던 할머니가 대박이를 보더니 줄을 풀어놓지 말라는 충고를 했지만,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새겨듣지 않았다.


소풍에 참여한 여러 가족들과 각자 싸온 음식을 내어 놓고 담소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대박이와 근처 잔디밭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큰애와 작은애가 멀찍이 떨어져서 서로 대박이를 불렀고 대박이는 이리 왔다가 저리 갔다가 하며 봄날의 따스한 기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에 시커멓고 커다란 대형견 한 마리가 아이들을 향해 뛰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놀라서 아이들 이름을 외치며 그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애가 나의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곤, 몇 미터 앞까지 다가온 대형견을 발견했고, 작은애는 필사적으로 대박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대박이에게 달려갔다. 작은애보다 먼저 대박이에게 가까이 간 대형견은 대박이를 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며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지 그 대형견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고, 수십 미터를 달리던 대형견이 물었던 대박이를 내팽겨 두고 달아났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내 마음속에서 자꾸 이러한 다짐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내동댕이쳐진 대박이에게 달려가 대박이를 안아 올리며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직 솜털이 가시지도 않은 하얀 뱃살에 큼직 막한 이빨 자국이 몇 개나 나 있었고 그 자국 사이로 피가 쏟구치고 있었다. 나와 애들 엄마는 급히 대박이를 데리고 근처의 동물병원으로 갔고, 가는 도중부터 대박이의 숨은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도착한 동물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동물병원에서 주는 작은 종이상자에 대박이를 넣고는 아이들을 두고 온 소풍장소로 와서 아이들을 데리 곤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대박이가 그렇게 죽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집에 와서 조차 큰애와 작은애는 계속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애들 엄마와 나는 아이들의 감정에 상처를 남겨놓지 않기 위해 불교의 윤회설과 같은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설명을 진지하게 늘어놓았다. 그렇게 통곡의 새벽이 이어지던 무렵, 베란다에 둔 대박이를 넣어둔 상자 겉에 '파트라슈'라는 강아지 장례식장에 대한 홍보글을 보았고 다음날 대박이의 장례를 치러 주기로 애들과 약속을 하고 겨우 애들을 재울 수 있었다.


다음날 부산 근교에 있는 파트라슈란 장례식장에 갔다. 강아지 장례식장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곳에서 깔끔하게 염을 하곤 삼배 옷을 이쁘게 입고 하얀 꽃들에 둘러싸여 누워있는 대박이를 마주하곤 우리 가족은 모두 또다시 통곡의 시각을 가졌다.


화장을 한 대박이의 유골을 작은 상자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께는 대박이 장례식 했는다는 얘기는 하지 마"라고 나는 말했다. 집에 와서 아파트 베란다 밖의 화단에 대박이의 유골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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