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에 남겨진 것들 002
나는 법률적 협의이혼을 하였다. 다만, '협의'라는 단어의 뜻처럼 쌍방 간에 의견 조율이 잘 되어 일치를 보았다는 의미에서 협의이혼을 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애들 엄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빚만 가져갈 것을 요구했고, 나는 일정한 분배를 원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애들 엄마의 요구대로 모든 게 결정 나 버렸다. 말이 협의이지 난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내 명의로 되어 있던 빚만 떠안고 이혼을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집은 애들 엄마 명의로 해 놓고 있었고, 빚은 내 명의의 신용대출이었기에 내 명의의 차량 한 대를 명의이전해 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절차 없이 재산분할이 이루어졌다. 아이들을 키우는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고, 아빠보다는 엄마에게서 양육을 받는 것이 더 나은 환경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공감대에 따라 양육은 애들 엄마가 하기로 하였다. 결국 나는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흔들림 없이 지낼 수 있는 방법으로 재산분할 없이 살던 집을 그대로 애들 엄마에게 넘겨주었고, 빚에 대한 부담능력이 높은 내가 빚을 떠안는 것으로 결정이 난 것이다.
협의이혼 시 기록된 내용으로는 위자료와 양육비는 일시금으로 집을 주는 것으로 했으니, 수억 원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월정액 양육비는 서로 구두로 협의한 대로 주기로 했고 법정기록에는 남기지 않았다.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아직도 우리 어머니께선 이해를 하지 못하신다. 이혼 초에는 '저렇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이혼을 한 것을 보니 애들 엄마 겁이나 주려고 하나 보다... 저러다 집에 다시 들어가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듯하였고, 최근에는 '우리 아들이 무슨 바람을 폈거나 해서 아주 책잡힐 짓을 한 게 분명해... 그러니 저렇게 다 뺏기고 쫓겨나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는 일정 부분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그렇게 애들 엄마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막장드라마를 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애정이 마르고 증오가 높다 해도 한 이불을 덮고 10년을 살아온 사람이었고,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의 엄마와 막장드라마를 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애들 엄마는 어디서 자문을 들었는지 막장드라마를 쓰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며 한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도 답답해서 찾아간 변호사 사무실에서 5천만 원에 월 120만 원으로 위자료와 양육비를 모두 정리해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애들 엄마와 돈문제로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애들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잃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많이 다독였다. 전화기 저 너머로 아무리 쇳소리가 들려도, '그래... 너 나떠나서 행복해야지...'라고 속으로 대뇌 었다. "난 당신이 행복해 지길 바래" 이 말이 흥분한 애들 엄마에게 항상 던지던 말이었다. 내가 무슨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보던 이혼한 가정들의 현실은 대부분 누가 누구를 버리거나 도망가는 형태의 이혼이었다. 즉, 쌍방 중 일방이 나머지 일방의 행복을 모두 가져가 버리고 한쪽은 불행한 삶을 마주해야 하는 경우였다. 이러한 이혼의 경우 대게 그 가정의 아이들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도 나는 후배 이혼 대기자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아빠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이혼은 아이들에게도 상처가 덜 하다"
빚만 챙겨 이혼을 하게 된 이유 중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게 바로 나의 대책 없는 자신감. 예나 지금이나 나는 근자감의 소유자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무슨 똥고집이 센지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바라는 것은 잘 밀어붙인다. 뒷감당 이런 거 전혀 생각 안 하고, 일단 이게 멋진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면 그냥 그렇게 해버리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에 부딪혀 호되게 고생해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머리가 나빠서 계산이 어두워 그런 것인지... 아무튼 나는 그냥 그게 남자답게 책임지는 멋진 행동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혼 이후 나에게 찾아오는 새로운 인연의 여성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친구 입장에서는 다른 곳에서 막 퍼다 주고 빈털터리가 된 상황의 멍청이를 대하는 느낌일 수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에는 조금 후회가 되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왕 이혼을 하려거든, 행복해 지기 위한 이혼이 필요하다. 그 행복해 지기 위함이란 것도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행복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아빠 엄마가 공히 이혼을 통하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부모의 이혼으로 발생하는 아이들의 불행은 최소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