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에 남겨진 것들 001
나의 옛 결혼생활을 돌아보자면, 겉보기에 별 문제가 없는 평범한 아니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었던 것이 분명했던 것 같다. 아들 딸 잘 낳아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나의 직장생활도 수직 상승하고 있었고 애들 엄마의 주부생활 또한 별문제 없었던 그런 가정이었다.
지금에야 눈에 보이지만 그때는 몰랐던 불행의 씨앗은 '지나치게 충실했던 성역할'과 '소홀했던 부부간의 감정적 교류'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거푸 조기진급을 하며 직장생활에서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고, 해마다 올라가는 연봉과 상당히 큰 금액의 성과급에 매몰되어 가정에 대한 관심을 전혀 두지 못했다. 애들 기저귀 한번 갈아준 적이 없었고, 설거지 한번 거들어 주지 못했다.
"내가 밖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 줄 알아? 당신도 집에서 치열하게 지내야지!"
어느 해인가 나는 회사에서 공로사원 표창을 받았고, 부상으로 가족 전체가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해 나의 타임 리포트에는 320일 연속 출근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이 산출되었고, 회사 내에서 워커홀릭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그해 설날과 추석에 나는 출장을 갔거나 밤을 새워 프로젝트를 해야 했고, 내가 없는 상황에서 애들 엄마는 아이들과 시부모를 모시고 운전을 해서 시골로 가야 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애들 엄마도 나의 균형 잡히지 못한 사회생활에 반기들 들지 않았다. 그때그때 늘어나는 아파트 평수와 살림살이에 대한 보상이 그 친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일해야 해' 내지는 '아~ PT 있는데' 이런 말 한마디면, 밤을 지새운 사무실 앞까지 와이셔츠와 속옷을 챙겨다 주면서 나를 응원을 했을 뿐 한 번도 푸념을 늘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어쩌다 사무실 근처를 지나다 연락이 되어서 점심이라도 한 끼 사주려고 근사한 곳으로 데려가면, 그 자리를 즐기지 못하고 '이게 이렇게 비싸?' , '비싸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게 않네'라고 손사래를 치는 스타일이라 생색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물론 그 시절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하나 없이 시작한 살림이었기에 아파트 평수가 늘어나는 만큼 빚도 늘어났으니, 애들 엄마의 머릿속엔 항상 가계부가 아른거렸을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나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잘하고 애들 잘 보는 사람.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성역할에 아주 아주 충실했다.
하지만, 결혼생활 10년 동안 나와 아내는 '사랑하는 부부'라는 단어가 손목이 오그라들게 들릴 정도로 서로에 대한 애정표현에 인색했으며, 둘 사이의 감정교류에 대한 투자를 사치스럽게 생각했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나의 책임도 없지는 않지만, 애들 엄마는 지나치리 만치 오로지 돈을 모으고 빚을 갚는데만 열중했고,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에 대하여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거, OO 꺼야,,, 애 혈소판에 도움이 된데..."
어느 날 저녁 식사 중 무심코 소고기에 젓가락을 자주 갖다 대던 나에게 애들 엄마가 던진 저 말이 나왔을 때, 내가 그것을 그냥 이해해 주고 넘어간 것이 지금에는 너무 후회가 되지만, 나보다 아이를 더 챙기는 애들 엄마에 대한 나의 이해조차 가장의 성역할이라고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큰애가 혈소판감소자반증의 기미가 있었기에 더욱이 그것은 당연해 보였다.
지금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애가 아프니 이해는 되는데,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나 먹을 거 생각해서 조금 더 많이 하지 그랬어? 당신이 애만 챙기는 것 같아서 내가 조금 서운한데..." 이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애니웨이,
나는 결국 37살에 이사가 되었다. 그 나이에 받을 수 있는 평균적인 수입보다 아주 많은 보수에 사인을 하며 싸이닝 보너스까지 두둑이 챙기게 되었고, 통장에 찍힌 싸이닝 보너스를 보며 즐거워하던 애들 엄마와 회사에서 제공한 법인차량을 처음 타고 아이들과 드라이브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이사가 되던 해, 우리는 심각하게 다투는 일이 생겼고 그 일로 나는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가지 않는 소극적 투쟁을 하였고, 애들 엄마는 그런 나를 무시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애들과 함께 생활을 이어 나갔다. 나의 소극적 투쟁이 1년이 되어 갈 때 우리는 별거를 시작했고, 그 이후 1년 만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물론 심각하게 다투는 일이 되었던 이혼의 스모킹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 일을 다시 꺼내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애들 엄마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일일이 열거하며 나를 합리화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실상 우리 이혼의 스모킹건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지나친 성역활에 충실한 나머지 서로 간의 감정교류를 무시한 일상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결국 스모킹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면 그 사건이 스모킹건이 되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