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서가 다하는 판타지 스릴러
어렸을 때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곳 바로 옆에는 공중전화 박스가 하나 있었다. 마침 주머니에 잔돈 몇 푼이 짤랑거리면 나는 종종 추위나 무료함을 피할 겸 그 공중전화 박스 안에 들어가 장난전화를 걸었다. 그래 봤자 우리 집, 친구 집 등 아는 번호밖에 걸 곳이 없어 숨죽인 나의 키득거림에도 정체가 들통나는 어설픈 장난 전화였다. 이제는 그 자리에 공중전화 박스가 철거된 지 오래다. 요즘도 아이들은 장난전화를 할까? 태어났을 때부터 스마트폰만 쓰고 산 아이들은 전화기를 집어 들 때까지 그 선 너머에 누가, 어떤 목소리가, 어떤 소식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묘한 설렘과 조급함을 모를 수도, 장난 전화 같은 건 이제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폰부스>, <폰> 이후로 걸려오는 미스테리한 전화의 특성을 살린 스릴러/공포 영화를 볼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스릴을 조성하기엔 우리 폰은 너무 똑똑해졌고 폰으로 하는 소통엔 더 이상 신비감이 사라져 한마디로 영화적으로는 김샌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2020년에 시대적 배경과 장르의 컨벤션을 살짝 뒤틀어 다시 '전화선 스릴러' 한편을 내놓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콜>이다.
'서연'이라는 우울한 얼굴의 여자가 어렸을 때 살던 집으로 돌아온다. 이야기는 쓸데없는 설명과 과정의 씬으로 시간을 지체하지 않더라. 서연은 오는 길에 폰을 잃어버렸고, 집에 돌아온 것이 달갑지 않으며, 바꾸고 싶은 과거의 상처가 있다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집전화를 연결하자마자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그게 20년 전 이 집에 살던 여자 '영숙'과의 첫 만남이다.
스물여덟 살 영숙, 무당의 신딸로 집에 감금되어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여자였다. 서연과 영숙은 시간을 초월하는 전화선에 의지해 이야기를 나누고 '엄마에 대한 증오'라는 공통된 감정으로 유대감을 쌓는다. 1999년의 영숙에게 집에 갇힌 어린애에게 동화책 읽어주듯, 영숙이 좋아하는 서태지가 발매할 미래의 노래와 2019년에 대해 속삭여준다. 서연이 2019년의 영숙을 찾아 그녀의 미래를 알려주려고 하는 순간, 영숙이 거절한다. 어쩌면 영숙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팔자가 더럽다"며 자신을 정화하려고 했던 무당의 말에서 맡은 불길한 진실의 냄새를.
여기서 둘은 파국을 초래하는 결정적 오만을 하나씩 저지르게 된다. 영숙은 화재사고로 죽은 서연의 아빠를 살려 과거의 흐름을 바꿨고, 가지지 못했던 화목한 가족이 주는 안온에 취한 서연은 영숙을 소홀히 대한다. 화가 난 영숙에게 서연은 그녀의 미래를 알려주고 만다. 무당 엄마가 결국 그날 밤, 영숙을 죽일 거라는 비밀.
영숙은 첫 살인을 저지른다. 이제 깨어난 그녀의 본능적 질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 전화기를 붙들고 자기가 깨운 20년 전 과거의 살인마와 싸우는 외로운 서연뿐이다. 심지어 서연은 전화를 걸 수 도 없다. 일방적인 영숙의 전화를 기다리며 전화벨 소리 끝에 무엇이 있을지 공포에 떤다. 영숙은 자신이 결국 경찰에 체포된다는 걸 알게 되고, 20년 전 어린 서연과 엄마를 볼모로 인질극을 벌여 겨우 쟁취한 자유를 잃지 않고자 한다.
<콜>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흔히 과거의 사소한 선택이 미래에 어마어마한 폭풍으로 돌아온다는 <나비효과>나 타임머신 영화들의 주제와 달리 과거와 미래가 직선으로 함께하는 영화의 타임라인 때문이다. 미래의 선택이 과거를 바꾸고, 바뀐 과거의 타임라인이 다시 미래를 바꾸는 원형 구조로 후반부의 이야기는 정신없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사실 모든 걸 초래한 건 서연이 영숙에게 말해선 안 되는 그녀의 미래를 알려준 선택이다. <콜>은 영숙이 첫 살인을 저지르는 중간 터닝포인트까지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인내하고 기다린다면 <콜>은 슬래셔 공포 영화의 장르적 재미와 흥미진진한 캐릭터의 변화로 보답한다.
싸이코,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할로윈, 스크림, 쏘우 등 슬래셔 무비는 살인마 캐릭터의 무시무시함과 매력이 승부처다. 고로 서연 캐릭터는 사실 비명만 맛깔나게 지르면 관객을 몰입시키는 제 역할을 다하는 가짜 주인공이고 진짜 주인공은 소화기와 칼을 들고 관객을 쫓아다니는 살인귀 '영숙'인 거다.
영숙은 무서워야 하면서 동시에 매력 있어야 한다. 어설프게 무서우면 관객들은 하품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비호감이면 또 안된다. 미스테리하고 쿨(?)해야 한다. 살인귀지만 일관성이나 일종의 신념이 없어도 안된다. 전종서는 여성 살인마 캐릭터가 쉽게 이뤄내기 힘든 그 밸런스를 완벽히 소화한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첫 살인 직후 그녀는 목욕재계라도 한 듯 후련한 얼굴을 하고 드디어 세상의 빛으로 걸어 나온다. 풀려난 육식동물마냥 닭 한 마리를 가볍게 해치우고 사람들 속을 어슬렁거리는 전종서 배우의 얼굴과 걸음걸이는 우리가 본 적 없는 새로운 살인마 캐릭터다.
누군가는 가장 비슷한 느낌으로는 추격자의 하정우를 떠올릴 수 있지만 내 느낌은 다르다. 강인한 기존 살인마 캐릭터보다는 전종서는 어딘가 나약할 것 같고 아슬아슬한 구석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점이 있다. 결정적 순간에 서연의 함정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도 바깥 사육장에 갇혀있는 강아지들을 구경했기 때문이다. '방해되는 인간은 거침없이 죽이지만 강아지는 죽이지 않는' 마지막 인간성으로 캐릭터의 호감도는 일정 이상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다. 육식동물로 치면 호랑이나 사자는 아니고 매끄럽게 기어 다니며 찢어진 눈을 깜빡거리는 뱀이다. 전종서가 연기하는 영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콜>의 단점은 조금 흐릿해진다.
결말까지 서연을 조이며 날뛰는 영숙을 보면서 이게 바로 풀만 먹이며 영숙의 본성을 집에 가둬뒀던 엄마가 두려워했던 미래가 아닐까 싶은 구석이었다. 영숙은 결국 무당 엄마의 예언을 피할 수 없었고, 서연도 원래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충현 감독은 2015년 단편 '몸값' 덕분에 <콜>을 각색, 연출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인터넷의 합법적인 경로로는 이 단편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몇 년 전 몸값을 본 적이 있는데 모텔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인물들의 동선, 순식간에 일어나는 캐릭터 간의 위계의 역전이 재미있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짧은 단편임에도 <몸값>은 <콜>처럼 컨벤션을 따르지 않는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었고 배우의 매력을 최대치로 살려주는 영화였다. 또 공통적인 매력은 레트로한 세트 미술의 터치다. <콜>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공간의 섬세한 미술과 동선의 활용이 영화의 맛을 살려준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봤다. 배우 뺨치는 외모는 예상하지 못해 조금 흠칫했다. 그가 만든 영화와는 조금 안어울린다. 그의 '잘 쓴 클리셰는 독이 아니다'라는 말이 인상깊었는데 <콜>에서 단편이 느끼게 해줬던 신선한 매력과 공포 영화의 클리셰가 주는 안정적인 매력을 전부 느낄 수는 있으니 확실히 <콜>의 클리셰는 독은 아니다. <몸값>과 <콜>의 잇따른 호평으로 떠오르는 신예가 된 이충현 감독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