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

사랑은 끝나도 춤은 계속돼야 해.

by 책영
Untitled-1-01.png


그 언제보다도 외로운 연말입니다. 발자국 별로 없는 거리와 사람들 사이 거리 두기만큼 마음이 헛헛합니다. 깨가 쏟아지는 로맨스 영화는 좀 짜증 나고, 새드는 청승맞을 때 좀 다른 결의 로맨틱 코미디가 필요하죠. 한 여자가 사랑에 이별을 고하는 러블리한 이야기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을 추천합니다.




사랑 앞에 찌질한 여자


‘사랑 앞에 찌질한 남자’는 영화, 드라마 역사에 유구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 캐릭터입니다.

태초에 <애니홀>의 우디 앨런과 그가 만들어 온 거의 모든 영화가 있고, 만약 그 분야의 왕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선 홍상수가 20년 넘게 비키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 앞에 찌질한 남자 이야기를 가장 사랑스럽게 그려 대중의 선택을 받은 영화엔 <500일의 썸머>가 있죠.

이렇게 사랑에 눈먼 찌질남들이 넘쳐날 때, 사랑 앞에 찌질한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500일의 썸머>가 나오기 12년 전 성별 반전의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데요. 로맨틱 코미디 퀸 줄리안 로버츠가 한발 늦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남의 결혼식에서 고군분투하는 찌질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자를 연기합니다.



로코 퀸 대전


4일 뒤에 줄리안(줄리안 로버츠)의 둘도 없는 '남사친'의 결혼식이 열릴 예정입니다. 서른 살까지 서로 짝이 없으면 결혼하기로 했었던 옛 연인이자 현 친구죠.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자신이 그를 오랜 세월 사랑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형적인 남 주기는 아깝다는 심리일까요? 아무렴 어떤가요. 감정을 깨달은 후에 돌아갈 방도는 없습니다. 줄리안은 두 눈 뜨고 마이클의 결혼식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곁에서 힘이 돼 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줄리안은 당장 그의 곁으로 날아갑니다. 실은 결혼식을 막기 위해서죠.


604.png


그러나 공항에 마중 나온 마이클의 약혼녀 키미는 줄리안의 예상과도, 우리의 예상과도 다릅니다. 라이벌 여자 캐릭터 치고는 너무 완벽하고 착하고 사랑스러워 죽겠습니다. 금발에 발간 볼이 빛을 발하는 20대의 '카메론 디아즈'가 키미를 연기하는데 줄리안 로버츠만큼이나 키미 캐릭터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캐스팅으로 빛을 발합니다. 90년대 로코 퀸들의 대접전입니다. 로코 퀸의 조건은 큰 입과 해맑은 미소인가 봅니다.

원래 키미 역은 '리즈 위더스푼'이 맡을 뻔했는데 줄리안 로버츠의 개인적인 추천으로 카메론 디아즈가 발탁됐다고 하네요. 줄리안 로버츠 특유의 시원시원한 미소에 지지 않는 큼직큼직한 미소로 맞서는 카메론 디아즈. 영화가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누가 더 사랑스럽나 전쟁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여하튼 키미의 환대와 천진난만함은 줄스를 더 괴롭게 합니다. 얼떨결에 신부 들러리까지 하게 된 줄리안은 이 결혼식을 막을 수 있으려나요?


image.jpeg


말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다급해진 줄리안은 온갖 방해공작을 다 동원해봅니다. 키미가 음치라는 약점을 알아내 가라오케 바에 데려가도 보지만, 끔찍한 목소리도 창피를 무릅쓰고 마이클을 위해 완곡을 하는 그녀의 진솔함을 당해내지는 못합니다. 사랑의 조건은 콩깍지라고 하죠. 마이클 눈에는 그런 키미가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악효과를 낳습니다.

좌절한 줄리안, 게이 친구 조지에게 구조요청을 합니다. 조지는 줄리안을 위해 만사 제쳐놓고 달려와줍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히어로는 조지와 줄리안의 우정이라 해도 과장이 아녜요. 조지는 딱 하나의 조언을 합니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
최악의 타이밍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607.png
610.png
6101.png
612.png


솔직해지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여기서 줄리안과 키미의 승부처는 이미 정해진 건지도 모릅니다. 줄리안은 솔직이 가장 어려운 여자입니다. 반면에 키미에게 가장 쉬운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다, 질투 나면 질투 난다 말하는 그녀에겐 게임도, 계산도, 후회도 없습니다. 줄리안은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게임에 뛰어든 것입니다. 이런 결말은 타이틀 시퀀스에서 신부와 들러리들의 노래로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그를 잡으려면 그냥 그를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세요...'라고 노래합니다. 이 신부는 키미의 캐릭터와 일맥상통합니다. 잘 보면 생김새도 많이 닮았죠.


무제.png


줄리안은 솔직하게 남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사랑을 위해 다 희생하는 여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좋아하는 감정 앞에서 솔직 담백 해지느니 한밤중에 이불킥이 맘 편한 저도 어떤 면에서는 '민폐 캐릭터'로 미움받을 줄리안이 더 친근했습니다. 애초에 마이클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키미였을 거예요. 자유로운 영혼의 줄리안이 마이클과 결혼했다 해도 행복했을까요? 다 각자 짝이 있는 거겠죠.


이 영화에서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조지가 마지막 조언을 하고 떠난 후, 결혼식을 지척에 앞두고 줄리안과 마이클은 유람선에서 추억을 곱씹으며 대화를 나눕니다. 줄리안과 마이클 사이에는 키미와 마이클 사이와는 다른 종류의 추억과 감정이 켭켭이 쌓여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한 발짝 놓쳐서 영영 사라져 버렸던 수많은 인생의 타이밍들이 떠오릅니다. 울어야 할 때 참지 않는 것, 웃음이 나올 때 웃는 것, 입안에 맴돌던 말들에 그때 기회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놓쳐버린 울음, 웃음, 표현들은 영영 사라져 버리고, 그 순간은 지나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거든요.


6133.png
614.png


줄리안은 눈물을 숨기며 마이클과 둘만의 노래였던 "The Way You Look Tonight"에 맞춰 춤을 추면서 깨닫습니다. 이제 둘의 사랑은 다른 국면에 접어들어 버렸다는 걸요. 더 이상 로맨스의 색깔은 아니지만 절대 낡지 않는 종류의 사랑도 있습니다. 언제고 구멍 나지 않을 둘만의 추억과 노래처럼요.

"The Way You Look Tonight" 외에도 좋은 음악과 경쾌한 뮤지컬 영화 같은 순간들이 많아요. 조금 유치하고 뻔해도 이 역시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이 제 연말 영화로 안전한 선택이 되는 이유입니다.

https://youtu.be/DmL4tDMTLiU


인생은 계속돼야 해


결국 너를 사랑해왔고 결혼식을 방해하려고 했었다는 진실을 고백하는 줄리안을 보고 키미가 오해를 하고 맙니다. 이제 망가져버린 결혼식을 다시 이어 붙이기 위해 줄리안은 뜁니다. 겨우 찾은 키미에게 줄리안은 청혼합니다. 내 남자 친구와 결혼해달라고.

616.png


말 많고 탈 많았던 결혼식이 무사히 진행되고 신부 들러리인 줄리안은 자신과 마이클의 노래였던 "The Way You Look Tonight"를 신혼부부에게 선물합니다. 새로운 주인을 찾은 노래는 키미와 마이클 사이에서 다른 의미로 변하가겠죠. 눈물과 미소를 머금고 행복한 신혼부부를 떠나보내고 철부지 같았던 사랑에 종지부를 찍은 줄리안. 패배감은 어쩔 수 었나 봅니다. 피로연 자리에서 외롭게 샴페인을 들이켜는데 조지가 나타납니다. 우울했던 줄리안은 조지와 춤을 추며 웃음을 되찾습니다. 조지의 말처럼 결혼은 없어도 춤은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afsdj.png

원래는 줄리안이 피로연에서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결말을 찍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의 결말이 사전 스크리닝에서 관객에게 좋지 않은 반응을 받으면서 호감도가 높았던 게이 친구 조지를 등장시켜 두 친구가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으로 엔딩을 바꿨습니다. 제게도 가장 매력적이었던 캐릭터가 조지라는 걸 생각하면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외롭게 집에서 이 영화를 보며 연말을 보내는 모두에게도 아주 훈훈한 엔딩입니다. 새로운 커플 탄생을 보느니 두 친구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사랑과 인생의 즐거움을 축하하며 추는 춤이 덜 씁쓸하니까요.

겨울 배경이 아니어도 음악부터 스토리, 캐릭터까지 연말 분위기 낙낙합니다. 따뜻한 방구석에서 보기 완벽한 영화죠. 결혼식은 막을 내렸지만 인생의 막은 내리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아직 쓰디쓴 사랑과 달콤한 사랑, 위로가 되는 우정의 순간이 많이 남아있기를 바래봅니다.




작가의 이전글처음보는 포식자의 얼굴, 넷플릭스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