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되거나 도둑이 되거나
가계부 쓰기라는 종목이 있다면 나는 가히 세계 꼴등이다.
돈이 들어오면 늘 하던 대로 소비용 계좌에 얼마를 남겨놓은 후, 대충 보험료나 월세 같은 고정비용으로 돈은 스쳐 지나갈 뿐인 계좌에 얼마, 나름 저축한답시고 다른 데 얼마 넣어놓고는 카드 하나로 한 달 내내 돈을 무턱대고 쓰는 편이다. 써서는 안 되는 돈은 다른데 묶어뒀으니 방심하고 쓰다가 월말이 되면 잔고를 보면서 다 제가 써놓고도 새삼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타입.
소비 사회에서 소비패턴은 곧 우리의 삶을 숫자로 써 내려간 이야기다.
그래서 날을 잡고 돈이 어디로 새는지, 내가 어떤 숫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카드 내역을 하나하나 정리해봤다. 그 결과, 카드 하나를 잘라버렸으며 많은 구독 서비스를 해지했다.
나는 내가 아직 필요도 없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편리하고 교활한 구독 서비스! 눈먼 돈이 소리 없이 손아귀를 빠져나가기 쉬운 세상이다. 바야흐로 구독의 시대인 것이다. 책도, 먹을거리도, 화장품도,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도 구독하는 세상.
구독이라는 트렌드는 편리함과 절약을 표방하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재구매 고객을 쉽게 확보하려는 브랜드들의 발버둥이다. (마케터의 말이니 믿어도 된다.) 절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잘 구독하면 우리는 좋은 습관을 만들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브랜드는 단순히 파는 것을 떠나 긍정적인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다. 잘 구독하지 않으면 매달 잘 쓰지도 못한 채 돈과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 된다. 나는 내게 정말 필요한 구독, 아깝지 않은 구독만 아래와 같이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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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흔한 구독 목적은 스트리밍일 것이다. 나는 시중의 거의 모든 OTT 서비스(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는 다 써봤다고 할 수 있다. 티빙, 웨이브, 왓챠 플레이,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라프타, HBO.. 대신 주로 한 달 구독을 하자마자 바로 해지해서 다음 달에 나도 모르는 새 결제가 되는 일은 없게 했는데 이유는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이 어떤 플랫폼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검색해서 보고 싶은 게 많을 때 구독해서 빠르게 보고는 다음 달에 땡기는 작품이 없으면 재구독하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내 지갑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 내가 제일 오랫동안 구독하고 있는 OTT 서비스는 왓챠 플레이다. 개인적인 브랜드에 대한 팬심이 조금 있다. 큰 이유는 왓챠와 연동하여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전체 유저의 별점과 비교적 클린한 평가를 볼 수 있어 영상을 고르기 쉬우며 UI가 가장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왓챠에 접속했을 때, 영화관에 들어선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기능만 있다. 개인적으로 넷플릭스의 미리 보여주는 기능을 싫어한다. 또 영화를 주로 보는 내게 가장 다양한 영화 콜렉션을 가진 왓챠가 적합하다. 왓챠는 현재 3개월마다 갱신되는 베이직 이용권으로 한 달 7,900원을 내고 있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서비스답게 소소하고 재미있는 이벤트와 큐레이션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이번 해리포터 전 시리즈 오픈 홍보는 분명 사내에 의욕적인 마케터가 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이상하게 정이 가는 왓챠, 넷플릭스에게 지지 않고 국내 OTT 서비스로 오래오래 봤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내가 넷플릭스는 안 쓰는 엄청난 왓챠 충성 고객은 아니다. 이번 구독 서비스 숙청 기간에 넷플릭스는 살아남았다. 넷플릭스를 구독하는 이유는 1) 넷플릭스 오리지널 2) 다큐멘터리 3) 간혹 왓챠에 없는 작품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취향이 아닌 게 많아 절반은 보고 절반은 일찍 하차하는 편인데, 다 떠나서 스토리텔링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넷플릭스 콘텐츠를 무시한다는 건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짓이라 서다. 반면에 넷플릭스는 의외로 재미있는 다큐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제작하는 '트루 크라임' 시리즈를 좋아한다. 다큐멘터리에 있어서는 왓챠보다 넷플릭스를 믿고 보는 정도니까.
넷플릭스는 친구 한 명의 계정을 추가하여 월 12,000원의 스탠다드 상품을 구독하고 있다. 나눠 내니까 한 달에 6,000원이다. 이 정도면 구독해둬도 손해는 아닌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미니멀한 구독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데 또 모르는 일이다. 곧 디즈니 플러스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홀려서 OTT 구독의 늪에 빠질지도.
유튜브 프리미엄은 음악을 듣기 위해 쓴다. 파트타임으로 마케팅 일을 하고 있는 내게는 유튜브 광고를 보는 게 도움이 된다. 그래도 음악에 심취해 있는데 중간에 조정석이 야나두!를 외치는 건 아무래도 참을 수 없다. 예전에는 잠깐 돈을 아껴보겠다고 월 1,000원이라 돈 아끼는 꿀팁으로 잘 알려진 인도 유튜브 프리미엄을 써보기도 했는데 VPN 우회가 영 불편하고 꺼림칙했다. 다시 월 10,450원을 내면서 각종 음악, ASMR, 명상 관련 영상을 즐긴다. 과거에는 멜론이나 Flo를 썼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국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의 뚜렷한 장점은 없고, 유튜브는 어차피 음악이 아니래도 현실적으로 끊기는 어려우니 유튜브 프리미엄을 쓰는 게 이득으로 느껴졌다.
코로나로 실내 체육 시설들이 타격을 입었을 때, 다운독을 발견했다. 'downdog'은 요가의 기본 동작이 되는 자세 명칭이다. 요가 수련 앱 다운독은 원하는 수련 시간, 나의 레벨, 요가 타입, 특별히 더 풀어주고 싶거나 단련하고 싶은 신체 부위, 속도, 자세 설명의 정도, 배경음악, 사바아사나 시간 (쿨타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등 아주 세세한 디테일을 설정해 시퀀스를 생성할 수 있다. 같은 조건을 입력해도 매번 다른 시퀀스를 구성해서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정말 사이버 요가 선생님이 생긴 듯한 기분이다.
아주 만족하며 3개월째 월 13,500원을 내고 있다.
좀 민망하지만 어쨌든 구독하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언급할 서비스는 영양제 구독 서비스 디엘오다. 프리랜서 마케터로 일하며 브랜딩과 마케팅에 직접 참여한 프로젝트인데 가격은 내게도 조금 부담스럽지만 구독하면 영양제 2box와 유산균 1box가 오니까 두 달에 걸쳐 먹으려고 한다. 66,000원의 가격을 두 명 또는 두 달에 나눠 월 33,000원이라고 생각하면 합리적이다. 브랜딩을 하면서도 가장 끌렸던 점은 필요한 영양소들을 한 포, 세 캡슐에 소분해 넣어 미니멀하다는 점이었다. 영양제 덕을 톡톡히 보고 있고 이것저것 챙겨 먹는 건 좋지만 매달 플라스틱 통 여러 개를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각각 꺼내 먹어야 하는 건 질색이다. 분리수거할 때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니멀한 패키지와 충분한 함량에 만족해 당분간은 계속 구독할 예정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 월 구독에 쓰는 돈은 총 70,850원이다.
10만 원이 넘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기왕에 욕심을 내다보니 5만 원 밑으로 내려보고 싶다. 왓챠의 지인들 계정을 추가해서 나눠쓰거나.. 아니면 유튜브 보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조정석의 야나두'를 내가 인내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고민 중이다.
동시에 내가 직접 구독 서비스를 만든다면 오히려 이런 게 필요하다는 딴생각도 든다.
먼저 내가 1년에 364일은 먹는 것 같은 커피. 커피 구독 서비스다. 돈을 좀 더 아끼고 좋은 커피 원두를 탐방하고 더 맛있는 커피를 받아먹을 수 있도록, 커피 원두와 관련 물품들을 구독하고 플러스로 커피 전문과 제휴로 구독자에겐 기프티콘이나 적립제도도 제공하는 거다. 비슷한 게 나온다면 한 두 달은 구독해볼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구독은 세상에 새로운 경험을 소개하고 습관으로 만들어 주는 것임은 분명하다. 소비패턴이 숫자로 쓴 각자의 삶의 이야기라면 구독 패턴은 숫자로 쓴 저자 소개 정도가 될까. 구독을 돌아보니 내가 보인다.
소개팅에서 해야 할 질문이 추가됐는지도. "어떤 것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