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식적으로 절대 쓰지 않는 말이 있다. '데리고 있다'는 표현이다. '아, 그 친구? 내가 데리고 있었던 직원이야' 할 때 그 ‘데리고 있다’ 이다.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이상하게 그 말이 거슬리고 싫었다. '데리고 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사이는 건달의 '형님-동생' 관계나 자기 개인 돈을 주는 고용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데리고 일했다'는 말 대신 '같이 일했다' 또는 '동료였다'는 표현을 써왔다.
‘모시고 있다’도 듣기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모시고 있다’는 표현을 그리 불편하게 느끼지 않고 종종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데리고 있다’와 ‘모시고 있다’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하나는 불편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을까?
두 표현 모두 두 사람이 아래위 관계임을 제 3자에게 밝힐 때 쓰는 말이다. ‘데리고 있다’에서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상하관계일뿐 아니라 주종관계(主從關係)라는 느낌을 준다.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당연히 상하관계이다. 상사는 일을 시키고 부하는 시키는 일을 하고, 상사는 평가를 하고 부하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상사와 부하 관계가 주종관계는 아니다. 상사와 부하 모두 조직의 독립된 구성원이다. 그래서 '데리고 있다'라는 표현은 그 말을 하는 윗사람을 제외한 듣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모시고 있다’도 주종관계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데리고 있다’는 상사가 하는 말이고 ‘모시고 있다’는 부하가 스스로 하는 말이다. 주종관계의 어감에도 불구하고 부하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부하가 상사와의 관계에 만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상사와 자신의 좋은 관계를 강조하고 싶거나 자신을 낮추어 말해 상사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부하는 ‘모시고 있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런 의도를 담고 싶을 때 ‘모시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같이 일했던 모든 상사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직장을 많이 옮겨 다녔고 상사도 여러 분이다. 이 글을 쓰면서 헤아려 보니 18명의 직속 상사와 일을 했다. 그중 ‘모시고 일했다’고 말하고 싶은 분은 다섯 분이었다. 그 다섯 분을 꼽은 이유는 그분들과 일하면서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분은 마주 앉아 내가 쓴 보고서가 새빨갛게 되도록 고쳐 주었고 또 다른 분은 단 몇 달 같이 일했어도 닮고 싶은 리더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후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나는 그분들이 했을 의사결정과 행동을 생각했다. 그분들은 단순한 상사가 아니라 나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주는 멘토였다.
'멘토'라는 단어는 ‘오디세이(Odyssey)’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친구이자 아들의 스승인 멘토르에서 유래한다. ‘이타카’의 왕인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멘토르에게 맡긴다. 그는 친구의 아들에게 자상한 선생과 조언자가 되고 때론 엄한 아버지가 되어 텔레마코스가 훌륭하게 성장하는 데 있어서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후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스승과 조언자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부하가 상사를 진정 멘토로 섬기는 관계는 상사가 아니라 부하가 정한다. 내가 부하를 데리고 있다고 해서 멘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하가 나를 모시고 있다고 해야 나는 멘토가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가 내게 와서 꽃이 된다고 시인은 말했다. 부하들이 나를 진정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하기 전에는 나는 멘토가 아니라 다만 한사람의 상사에 지나지 않았다.
같이 일했던 부하 직원들은 나를 뭐라고 부를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