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커피숍에서 커피와 크로와상을 샀다. 계산해 주는 종업원이 '데워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크로와상을 따뜻하게 하지 않고 그냥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다른 곳을 쳐다 보다가 일초 정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종업원은 짜증스럽다는 음성과 표정으로 ‘데.워. 드.릴.까.요?’ 하는 것이었다. (음성 지원이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뭐 이런 친구가 있나 싶었다. 다시 쳐다 봤다. 복학생 분위기의 꾸미지 않은 용모에 점을 뺐는지 얼굴에는 살색 반창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 멍한 기분으로 별 다른 대응은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반응이 늦은 편이라 ‘그때 화를 냈어야 하는데’ 하고 씩씩거릴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회보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 종업원에게 한 마디 했어야 했을까? 했어야 할 거 같다. 뭐라고 했어야 했을까? 젊은 사람이 태도가 왜 그래! 그건 꼰대스럽다. 그런데 내가 그 친구한테 뭐 잘못한 게 있기는 한가? 그래도 손님이 대답 좀 늦게 했다고 종업원이 그렇게 응대하는 건 아니지. 그는 왜 그런 식으로 말했을까?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겠지 등등.
내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라고 했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제가 뭐요?’
‘지금 손님한테 짜증을 내고 있는 거 아니요?’
‘아닌데요. 저는 크로와상을 데워 드릴까 여쭤 본 건데요?’
하는 식으로 꼰대와 밀레니얼 간의 소모적인 대화가 이어졌을 수 있다. 한편 그가 그냥 고분고분하게 ‘죄송합니다’ 했다면 내가 몇 마디 더 투덜거리고 상황이 종료되었을 것이고.
크로와상을 씹으며 생각했다. 그 종업원이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고 내가 기분 상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면 어떤 말을 던져야 했을까? 경영자 코칭을 공부할 때 배웠던 코치의 수칙이 생각났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준다.’
그때 내게 코치 본능이 충만했다면 이렇게 시작했어야 했다.
‘바쁜 아침에 내가 바로 답을 하지 않아서 화가 났군요.’ 이렇게 말했는데,
‘네. 바쁜데 대답을 안하셔서 화가 났어요. 다음부터 그러지 마세요.’ 하는 종업원은 없을 것이다.
대개 찔끔해서,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상황이 종결되었을 것이다. 좀 삐딱하게 나왔다면,
‘아니요. 화 안났는데요.’ 했을 것이다. 그러면,
‘화 안났다면 다행이네요’ 하면 된다.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면 내가 기분 나빴다고 직접 언급하지 않았어도 종업원은 자신의 행동에 내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겉으로 자기가 잘못한 게 없는 척해도 속으로는 찔렸을 것이다.
크로와상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으며 깨달은 것은 결국 내가 먼저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주면 상대방도 내 기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즉, 알리려 하지 않아도 알아 주면 알게 된다. 하지만 당시 내 마음의 상태에 장착된 렌즈의 상태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 줄지 내 마음을 표현하고 말지가 결정되리라. 당시 내 마음에 장착되어 있던 렌즈는 다행히 평정심에 맞추어진 렌즈였던 것 같다. 항상 평정심의 렌즈만 장착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내 마음에는 평정심에서 노여움을 오가는 줌 렌즈가 끼워져 있다.
‘마음을 거울같이 하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누구의 말인지 찾아보니 장자의 말이었다.
덕이 높은 이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보내지도 않고 맞아들이지도 않으며,
비쳐주기만 하고 잡아 두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에 군림하면서도
스스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
마음에 끼워진 렌즈는 상대방이나 상황을 렌즈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 마음에 새긴다. 마치 사진처럼 말이다. 마음에 거울이 끼워져 있다면 거울은 상대방의 모습이나 상황을 비추어 준다. 렌즈와 달리 거울은 상대방이나 상황을 내 기분에 따라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본디 그 모습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 원래 모습을 담담히 바라 보고 상황이 끝나면 내 마음은 다시 텅빈 상태로 돌아온다.
내 마음에서 흐릿한 줌 렌즈를 떼고 잘 닦인 거울을 장착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