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혁에 대한 개인적 평가다. '배우들의 배우'라고 불리는 정우성이 영화 '비트(1997)'로 '반항아'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1990년대, 장혁이 아니라면 누가 또 '반항'이라는 키워드를 대체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데뷔 초 '리틀 정우성'이라고 불렸던 장혁은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로 뿜어내는 분위기마저도 정우성과 닮아 있었다. 배우보다 모델에 더 가까웠던 장혁을 대중이 연기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때는 1999년이다. KBS 드라마 '학교'에서 '반항아'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부터다. OST가 더 유명했던 MBC 드라마 '햇빛 속으로(1999)'에서 맡았던 역할도 '우수에 젖은 반항아'였다. 감히, 홍콩영화 '천장지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드레스를 입은 채 약혼식에서 도망친 김하늘을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경찰차의 추격을 피해 질주하던 장혁의 눈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까지 필자에게 장혁은 '반항'이라는 키워드 그 자체였다. '비트' 이후로 다양한 연기에 도전한 정우성과 달리, 장혁은 한동안 '반항'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장혁이 연기의 폭을 넓힌 첫 작품은 2002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알던 장혁'은 아니었지만, 꽤 훌륭하게 철부지 재벌 2세 역할을 해냈다. 몽골에서 한 예능프로그램을 촬영하던 장혁에게 현지인이 다가와 '한기태(극 중 이름)'라고 불렀을 정도로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다. 당시 최전성기였던 장나라의 공이 컸다. 개인적으로는 그전까지 (주연 치고는) 적은 대사와 강렬한 눈빛만을 보여줬던 장혁이 처음으로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병역 문제로 '반성의 시간'을 가진 장혁은 훗날 KBS 드라마 '추노(2010)'로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필자의 눈에는 '반항아'의 잔재와 연기에 대한 '갈망', 의도치 않았던 인생의 '굴곡' 등이 추노의 '이대길'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장혁의 연기 인생에 꽃이 필 것 같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이후, 장혁이 보여준 연기는 발전이 없다. 정확히는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장혁을 탓하기 애매하다는 점이다. 필자의 시각에서 장혁은 누구보다 연기에 진심인 배우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촬영이 시작되면 온몸을 던지는 배우다. 병역 문제를 제외하면 가십거리로 삼을만한 사소한 스캔들도 없다. 말 그대로 '성실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배우'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액션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굳이 액션이 필요하지 않은' 작품에서도 꼭 액션 연기를 보여주려 하는 (필요치 않은) 열정 때문이다. 장혁이 KBS 연기대상을 수상한 직후, 선택한 작품은 SBS 드라마 '마이더스(2011)'였다. 당시 '물 오른 연기'를 보여줬던 김희애와 여전히 '주목받는 신인' 이미지였던 이민정이 함께 출연했지만, 캐스팅의 무게감에 비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이 작품에서 장혁은 변호사이자 업계 최고의 펀드매니저 역할을 맡았음에도, 결국 액션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분명, 시나리오는 '기업 간의 인수합병'이 주요 소재였지만, 여기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복싱과 절권도를 가미한 액션까지 소화한 것이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는 액션신(scene)이 필요치 않다 보니,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잔뜩 추가될 수밖에 없었다. 천재 변호사에게 거친 액션 연기가 썩 어울리지 않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두 번째는 의리와 익숙함이다. 장혁이 작품을 선택할 때마다 매번 캐스팅에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겠지만, 유독 함께 연기한 경험이 있거나,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배우들과 연기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장나라(명랑소녀 성공기+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여기 대입할 수 없는 경우라고 쳐도, 이다해(불한당+추노+아이리스2)는 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올해 개봉한 '더 킬러'의 신승환과 최기섭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함께 출연한 예능에서 인연이 닿은 배우 손현주가 '더 킬러'에 우정 출연한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더 킬러'에 앞서 개봉했던 영화 '강릉'에서도 유오성을 제외하면 장혁과 친분이 있는 배우들의 얼굴이 계속 눈에 띈다. 작품이 바뀔 때마다 모든 측면에서 전작과의 차별화를 고민하는 여타 배우들과는 다른 행보다. 심지어 장혁은 본인의 연기도 항상 비슷한 톤을 유지하지 않는가. '강릉'과 '더 킬러', '검객'의 장혁을 전혀 다른 세 명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눈빛도, 목소리도, 억양도 동일 인물이다. 이들을 구분 짓는 요소는 작품뿐이다.
다만, 검객에서는 트래핑(상대와 팔을 부딪치거나 잡아채는 동작)을 기반으로 한 액션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펼치는 액션 연기의 특성상 트래핑이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점은 인정하지만, 모든 작품에서 트래핑을 보여주는 건 지나치다. 그런 측면에서 검객은 초지일관이었던 '장혁 액션'에 다소 변화를 준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영화 '더 킬러: 죽어도 되는 아이'의 한 장면.
영화 '더 킬러'를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장혁의 연기 인생의 두 번째 터닝포인트는 지금이라고. '강릉'과 '검객'에서 차곡차곡 쌓여왔던 안타까움이 임계점에 닿았다. 여기서 장혁이 변화를 결심하지 않으면 앞으로 작품도 대동소이할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반항아' 연기를 시작으로 '철부지 재벌 2세'까지 소화했던 만큼의 변화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액션을 제외한 장르를 고려해보길 권한다.
물론, 신체적으로 힘든 시기가 올 때까지 최대한 액션 연기를 하고픈 마음(계획)이 있겠지만, 알다시피 액션 배우는 배우의 한 갈래일 뿐이다. 한 예로 배우 이소룡이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액션 연기를 시도하고, 본업인 무술인으로서 무술에 대한 철학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단순히 액션 영화를 많이 찍는 것만으로는 '전설적인 액션배우'가 될 수 없다.
우선, 배우로서 인정받아야 액션 연기도 돋보인다. 최근 몇 년간 마음이 가지 않았던 장르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움직임' 측면에서 본다면 장혁은 이미 국내에선 액션 연기가 손에 꼽히는 배우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액션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는 만큼 조급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더 킬러' 이후의 작품에서는 '액션을 하지 않아도' 연기만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배우의 모습을 한 번쯤은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