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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용 Jun 17. 2022

설국열차보다 강력한 다크나이트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

내 눈에 설국열차(2013)와 다크나이트(2008)는 둘 다 '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돈은 단어 그대로 받아들여도, 의미를 확대해도 좋다. 거창해 보이는 '자본' 대신 돈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입에 더 잘 붙는 데다, 내가 느낀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는데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오가 없어? 자본이 없지"라고 말하는 사람 설마 없을 거라 믿는다.


물론, 두 영화를 한 가지 관점으로만 감상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 각각의 리뷰를 작성한다면 이 글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졌겠지만, 오늘 할 얘기는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참고로 영화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를 중심으로 중국 영화배우 성룡의 영화적, 사회적 가치관을 곁들이면 더 풍성한 썰을 풀 수 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설국열차와 다크나이트, 두 영화만 다루기로 했다.


우선 설국열차가 떤 이들에게는 몽(啓蒙)적 성격이 있다는 시각이다. 누군가는 계몽이 아닌 '선동'이라고 표현하고 싶겠지만...


설국열차는 묻는다. 당신이 태어나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데올로기가 실제 그 정도로 완벽한가. 그 틀을 벗어나면 정말 위험한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안에서만, 그 질서를 유지하는 선에서만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봐라. 열차가 멈추고 탈선했지만 인류는 살아남았다"(북극곰도)


설국열차는 영화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개봉한 해에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과 최우수작품상을, 이듬해에는 미국 보스턴 온라인 비평가협회상 최우수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누적 관객은 900만 명을 넘겼으니, 대흥행의 척도인 '1000만 영화'에 준한다. 이 정도면 작품성과 흥행 모두 크게 성공한 영화다.


그런데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거장 '봉준호'라는 이름, 그리고 무려 크리스 에반스와 틸다 스윈튼이 출연한 한국 감독의 영화라는 희소성에 설국열차가 있는 힘껏 외친 목소리는 뒷전으로 밀린 느낌이다. 더 정확히는 설국열차가 하려는 얘기를 이해해도 '내 삶'을, '내 가치관'을 실제로 바꾸려는 관객은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이해와 적용이 무조건 비례하지는 않으니까. 슬프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렇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참 영화를 재밌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다크나이트 트릴로지'로 불리는 배트맨 3부작은 작품성에 대한 평가를 제쳐놓고 재미로만 따져도 손에 꼽는 영화다. "배트맨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면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DC의 히어로물 특성상 재미는 따 놓은 당상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조엘 슈마허 감독의 '배트맨과 로빈'(1997)이 답이 될 것 같다. (충분히 재밌게 본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돈이 어쨌느니, 계몽이 어쨌느니 하다가 왜 갑자기 '재미'를 논하는가 싶겠지만, 내 눈엔 그 '재미'가 문제다. '재밌는' 다크나이트는 설국열차가 의문을 제기 그 이데올로기를 너무 '당연'한 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크나이트에서 극 중 조커(배우 히스 레저)가 하비 덴트(배우 아론 에크하트)를 살해하기 위해 브루스 웨인(배우 크리스찬 베일)의 펜트하우스에 침입한 신(scene)을 기억하는가. 개인적으로 다크나이트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가 나오는 이다. 한 노(老) 재벌은 조커에게 말한다. "우리는 당신 같은 범죄자를 두려워하지 않아", 그러자 조커가 소름 돋는 동문서답을 한다. "당신을 보면 내 아버지가 생각나. 무척 싫어(증오)했었는데"라고. 그 대사와 함께 조커가 나이프를 들이밀자 겁에 질려 눈이 커진 노 재벌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노 재벌은 조커를 단순한 '범죄자'로 규정했을 때부터 이미 조커의 '밥'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회적 가치관에서 력이나 권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대부분의 범죄자대적 약자다. 하지만 조커는 그러한 개념이 무의미하다. 담시를 유린하는 이유도 재벌들에게는 차고 넘치는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덕분에 산처럼 쌓인 돈에 휘발유를 붓고 불태우는 조커와 어마어마한 재력으로 무장한 배트맨의 대결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지만.

조커가 침입한 펜트하우스가 어디인가. 고담시 한 복판에 위치한 고층 빌딩의 최상층이다. 이는 물리적 높이만 뜻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 서민은 재벌들의 파티를 구경도 할 수 없다. 애초에 언제, 어디서 파티가 열리는지 알 수 있는 정보력만 있어도 평범한 서민으로 볼 수 없다. 금 더 과격한 가정을 곁들이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한 재벌이 한 서민의 삶에 피해를 입히려고 마음먹는다면 실행 여부와 별개로 능력은 충분하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개인 대 개인이라면 불가능에 가깝다. 조커가 노 재벌이 얘기하는 범죄자였다면 이 공식이 성립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고담시의 범죄자 대부분은 펜트하우스에 모인 재벌들과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다. 속된 말로 노는 물이 다르니까. 이들 사이에는 펜트하우스만큼 높은 신분의 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조커는 고담시의 재벌들이 모인 그곳에 거리낌 없이 들어와 분위기를 압도한다. 시종일관 좌불안석이었던 하비 덴트를 떠올려보라. 지방검사라는 신분을 갖고 있음에도 재력이 없는, '특별히 예외적으로' 초대받은 그에게 펜트하우스에 모인 재벌들은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고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들의 이데올로기 안에 속해 있는 이상, 범죄자들이 벌벌 떠는 하비 덴트도 상대적 약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재벌들이 조커를 두려워한 이유는 단지 무기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조커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속해있지 않다. 그들은 그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힘을 발휘한다. 그들 눈에 조커는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물질 같은 존재다. 그 정도 충격이라면 조커의 등장과 함께 일순간 침묵했던 그들의 비겁함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또한, 그들의 상식으로는 조커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한 예로 조커가 하비 덴트의 위치를 물으며 한 여성이 들고 있는 샴페인이 담긴 컵을 빼앗았을 때 그 과정에서 이미 샴페인은 바닥에 모두 쏟은 상태다. 나올 게 없는 빈 컵을 입에 대고 고개를 뒤로 젖히는 조커는 노 재벌이 생각하는 '범죄자'와는 이미 차원이 다른 존재다. '컵을 들고 마시는 행위'를 했을 뿐, 실제 샴페인을 마셨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앞서 마피아들의 은행을 습격한 것도 돈이 필요하다는 목적보다 '약탈', 빼앗는 행위 자체가 포인트였다. 노 재벌의 말과 반대로 조커야 말로 그 재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무기이자 방패인 재력은 조커에게 빈 컵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1989년 팀 버튼 감독의 작품을 시작으로 두 번의 리부트를 거친 배트맨 시리즈 모두 고담시가 범죄의 소굴이 된 원인은 오랜 불황이다. 다크나이트와 대비되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2019)' 속 고담시도 같은 이유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됐다. 여기서 설국열차가 던진 질문을 한 번 더 떠올려보자. 당신의, 아니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완벽한가.


이 글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헤게모니에 대한 얘기도 아니다. 다만, 다크나이트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전제한 영화 속 이데올로기를, 일말의 거부감도 없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이 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감정이다. 아울러 설국열차는 다크나이트 못지않게 작품성과 흥행 모두 성공한, 영화계에서 영향력이 큰 영화지만, 반대로 관객에게, 우리 사회에 그만큼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의문이다. '조용한' 다크나이트가 '목이 터져라 외친' 설국열차보다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맷 리브스 감독의 영화 '더 배트맨'(2022) 초반부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알 수 없다. 살인, 강도, 폭행 모두 2년간 악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주인공의 고뇌가 와닿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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