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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Oct 27. 2022

언덕배기 집 맏이

로렌스 아저씨의 집을 상상하며

   4년 전 발령 동기 친구들과 남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이 여행은 내 환갑 기념 여행이기도 하다. 비즈니스 좌석과 함께 모든 숙소와 음식이 가장 값비싼 수준의 패키지였다. 평생을 교육계에서 고생한 나에게 스스로 고생했다며 다독여 주는 보상과도 같았다.

  프랑스 니스에 도착하고 바로 다음 날, 프로방스의 전망을 보았다. 유럽 특유의 길쭉한 초록 나무들이 빼곡한 거대한 숲 가운데에 웅장한 저택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저택 중 하나라는 이곳은 벨기에 레오폴드 국왕 2세가 연인에게 선물한 별장이다. 가이드가 프랑스는 높은 곳의 집이 가장 비싼데 우리나라는 산꼭대기 집값이 가장 싸다고 한다. 그 말에 어릴 적 살던 집이 떠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교사인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받아 상도동에 집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산 00 번지’라는 집 주소가 붙었었다. 방이 네 개인데, 두 개는 세를 놓았다. 셋방 사람들이 자주 바뀌었다. 뒷마당에는 봄이면 황매화가 노랗고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가을엔 빨간 구기자 열매를 볼 수 있었다. 뒤란엔 된장이며 고추장 장독대가 있었고, 다락방에는 오래된 냄새가 나는 책들이 가득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그중 ‘작은 아씨들’을 읽게 되었다. 우리 집은 자매 넷이 연년생이었고 막내만 9살 차이가 나는 딸 다섯의, 딸 공주 집이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시절 내내 ‘작은 아씨들’이란 책에 무척 몰입하게 되었다.      


  언덕배기를 오르는 사람들에게 낱장으로 한두 장씩 들린 연탄이 매우 고단해 보였다. 버짐이 가득 핀 얼굴의 때 구정물이 가득한 아이들도 안타까웠다. 이 산 동네를 벗어나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를 가다가 전철표를 주웠다. 집을 나가게 되면 그 전철표를 쓰려고 주머니에 고이 잘 간직해두었다. 이 산동네를 떠나기만 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이웃 ‘로렌스’ 아저씨처럼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산동네에 사는 어린 내가 겨우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로렌스' 아저씨의 집은, 바로 내 친구의 집이었다. 가끔 놀러 가본 친구의 집은 일본식 정원으로 아담하게 꾸며져 작약꽃과 모란꽃이 피어 있고, 대문 앞에는 까만 ‘코티나’ 승용차가 위엄 있게 서 있는 그런 집이다. 그 집 정원은 늘 화려한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친구 집에서 과외 공부할 때 가정부 언니가 귀한 버터로 볶은 볶음밥을 예쁜 그릇에 내주었었다. 처음 먹어보는 그 맛! 정말 황홀했었다.     

 

  매일매일 그 전철표를 바라보며 꿈을 꾸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표를 잃어버렸다. 며칠을 찾아도 없었다. 내 소중한 미래의 집이 없어진 것 같았다. 슬펐지만 언젠간 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살았다. 아니 하루하루를 버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 비 오는 날 뒷마당에 똥을 한 바닥 싸놓고 갔다. 아버지의 동복 양복을 훔쳐 갔다. 우리 자매가 자는 방에는 캐시미어 담요가 수십 장 있었는데 그건 건드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담요 계를 들어서 형형색색의 담요를 우리 집에 잔뜩 쌓아 두었었다. 아버지의 양복 속에 있는 학생들의 저금통장은 마당 수돗가 평상에 비 맞은 채로 펼쳐져 있었다. 빗물에 젖어 잉크 자국이 번진 저금통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아버진 하나밖에 없는 겨울 양복이 없으니 할 수 없이 여름 양복을 입고 학교에 출근하셨다. 학생들 돈은 건드리지 않고 양복만 가져가 다행이라고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부모님이 막내를 데리고 충청도 외가엘 가셨다. 동생들과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밤에 잠을 자는데 부엌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집에 도둑이 들은 터라 신경이 예민해졌다. 비 오는 날 도둑맞았는데, 그날도 비가 왔다.

  ‘도둑이 들었나?’

  동생들을 위해 용기를 내야 했다. 부엌 불을 켜고는 숨을 크게 쉬고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잠을 자려는데 또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특단 대책이 필요했다. 옆방에 세든 아주머니를 깨웠다.

  “아주머니! 아무래도 우리 집에 도둑이 온 거 같아요. 어떡해요?”

  옆방에 아주머니는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고등학생 언니랑 둘이 살아 집안에 남자라곤 없었다.

  “불이야라고 소리를 질러!”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동생들도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불이야! 불이야!”

  산동네 사람들이 손전등을 켜고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난 불빛을 보자, 도둑이 현관으로 뛰어 들어오는 줄 알고 현관 유리문을 열지 못하도록 있는 힘을 다해 꽉 움켜쥐었다. 잠시 후 어른들이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들고 우리 집에 들어왔다. 불이 나지 않고 도둑이 온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사람들이 우리 집을 살피다가 다시 돌아갔다. 다음 날 부모님은 맏딸의 ‘과대망상 새벽 도둑 소동’을 이웃에게 들어야 했다. 며칠간 이웃 사람들과 마주칠 걱정에 고개를 들고 다니질 못했다.      


  아버지는 자매들이 서로 싸우는 날이면 어김없이 모두 둘러앉게 했다.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며 고쳐야 할 점을 이야기하라셨다. 그리고는 훈육의 순서로 첫째인 나부터 작은 밥상 위에 올라가도록 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옆집에 세 들어 사는 내 또래의 소년이 흘끔흘끔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나는 맞아서 아픈 게 아니라 너무 수치스러워 아팠다.  

   

  동생들이 비슷한 연령대이다 보니, 친구들과 노는 시간보다 동생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많았다. 책상에 뺑 둘러앉아서 집안일 당번을 정하기도 했고 서로의 꿈도 이야기했었다. 나는 ‘작은 아씨들’의 ‘조’처럼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런 성격이 부러웠었고, 막연히 아버지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꿈은 부모의 최면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즈음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이란 노래가 한참 유행이었는데, 둘째와 셋째가 나팔바지를 입고 그 노래를 곧잘 불렀다. 둘째는 몸이 약해서인지 백의의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셋째는 무대에서 화려하게 춤을 추는 ‘백댄서’가 꿈이었다. 말을 조곤조곤 잘하는 넷째는 장래 희망이 변호사였다. 막내는 아직 어려서 늘 내가 돌봐야 했다. 북한군이 쳐들어와 막내를 업고 뛰는데, 뛰어도 뛰어도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인 꿈을 자주 꾸었다. 

     

  K대 대학원 시절이었다. 교사가 되었지만 다른 꿈이 있어서 밤에는 야간 경영대학원을 다녔었다. 그 당시 학생회 부회장이었던 선배가 아프다고 해서 임원 몇 명과 함께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삼청동 그 집은 차를 가지고 가야 집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소설 ‘레베카’의 ‘맨덜리’ 저택이 연상될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프로방스의 저택처럼 산꼭대기에 있는 그 집은 차를 타고 대문을 지나고 또 울창한 숲을 지나 한참 가야 했다. 푸른 풀장도 보이고, 개집도 보였는데 개집 크기가 그 당시 우리 집만 하였다. 건물 두 채가 떨어져 있었는데, 자녀 건물과 부모 건물이라 했다. 그 여자는 30대 중반이었고, 남편도 그 정도의 나이라고 들었다. 두 분 다 부친이 유명회사의 회장이었다. 

  그 여자는 허리디스크로 누워있다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늦여름이었는데도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벽이며 바닥이 온통 하얀 대리석이었다. 지금 우리 집 거실벽도 대리석이지만 그 당시 전체 대리석 장식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그런 어마어마한 집에 가질 것 다 가진 여자가 아팠다. 우아한 크림색 얼굴이 파리했다. 대리석처럼 아름다웠지만 우울해 보였다. 그 집을 방문한 지 38년이 지났지만 미끈거리고 차갑던 감촉이 기억에 남는다.

  ‘ 혹시 미끄러지지 않을까? ’

조심조심 발끝에 힘을 주며 걸었었다. 북악산의 단풍이 시작되었나? 노랑 빨강이 드문드문 섞인 푸른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퍼덕이었다. 짧은 소매의 옷이 춥게 느껴졌다. 그 뒤로 내가 꿈꿔왔던 ‘로렌스’ 아저씨의 집, 상상 속의 그 집이 바뀌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아픈데 없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따뜻하게 사는 집이면 그저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난 20층 아파트의 제일 꼭대기에 산다. 9년 전 딸이 졸업하고 취업하여 따로 오피스텔을 사주고 지금의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그전에 살던 아파트에 비하면 다소 적은 평수지만 20층 꼭대기라 좋았다. 안방의 침실에 누우면 하늘의 별과 달이 보이는 게 너무 신기했다. 조각처럼 잘 빚어진 초승달도 보이고, 그믐달도 보였다. 

  “여보! 저 달 좀 봐!”

  하고 자는 남편을 깨운 적이 많다. 

  같은 라인의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었다. 내가 20층 숫자를 누르는 것을 보고 

  “오메! 20층에 사요? 허어! 그라고 높은 곳에 살면 어지럽지 않을까?”

  도시의 아파트에 처음 온 듯 시골에서 온 분이 내게 말을 건넨다.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찬다. 그러고 보니 20층 살면서 한 번도 높아서 어지럼을 느낀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높은 곳에 살아서 익숙해진 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똘똘 뭉쳤던 연년생 다섯 자매는 각자 바쁘게 살았다. 나는 종군 기자가 멋있어 보여 그 길을 가고 싶었으나 교직을 택해 결국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몸이 약했던 둘째는 심장 수술을 여러 번 하더니, 골프 싱글이 되어 건강을 되찾았다. 셋째는 커가면서 고전 무용을 꿈꿨지만, 집안 형편으로 꿈을 접고, 대구에서 맏며느리 역할하느라 바쁘다. 넷째는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막내는 CEO로 사업가가 되었다. 그리고 유기견 다섯 마리를 사랑으로 키운다. 어쩌다 자매들이 모이면 어릴 적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부모님이 나에게만 특별히 소풍 때마다 '맏이'라고 새 옷을 사주시면 동생들이 물려 입었었다. 그땐 당연한 줄 알았는데, 이젠 미안함을 느낀다.     


  퇴직하고 시간이 많아져서일까? 요즘 어렸을 적 상도동 집이 많이 생각난다. 한여름 늦게까지 동생들과 땅따먹기나 공기놀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밥 먹으러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치시던 어머니 음성이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어머니가 손수 떠 준 빨간 스웨터를 입고 대팔 연탄공장 언덕을 동생들과 함께 올라가며 너무나 추워서 울었던 그 골목길! 푸른 양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 집 ‘쫑’이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길 것 같다.  

   

  어린 시절 소중하게 여겼던 그 전철표를 이젠 찾지 않는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데이지를 위해 마련한 저택은 한낱 헛된 꿈이었다. 반짝이며 빛나는 저택에 데이지와 개츠비는 함께 살 수도 없었을뿐더러, 그 안에 행복도 없었다. 커가면서 막연하게 꿈꿔왔던 '로렌스'의 집의 그림에 지금은 우리 가족과, 소중한 추억의 언덕배기가 찬란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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