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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Oct 27. 2022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밥상 이야기

몇 년 전 친구들과 남프랑스를 여행했다. 여행 중에 한 친구가

  “넌 왜 그렇게 뚱뚱하니? 많이 먹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맛있는 도미 요리를 먹다 말고 뜬금없다. 묻는 것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투다. 다른 친구들도 그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리 친하다고 정면에 대고 그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했나? 여행 내내 기분이 나빴다. 사실 ‘뚱뚱’이란 단어까지 써야 할 정도의 체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체중이 조금 초과했을 뿐이지.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여행 다녀와서 살을 빼보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했었다. 비싼 경락도 받아보고, 운동도 해보았는데, 살을 빼지 못했다. 그렇다. 인정하자. 나는 식탐이 많다. 운동량보다 훨씬 많이 먹어서이다. 먹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생생 정보통 맛집’이나 ‘한국인의 밥상’ 등 맛집을 소개하거나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한다. 반짝이는 은갈치가 방송에 나오면 그것이 먹고 싶어 여수까지 찾아간다. 정갈하고 맛깔난 민박집 밥상이 소개되면 언젠가는 꼭 그곳에 가려고 계획을 세운다. 내 입맛에 맞을 맛집이 소개되면 그곳의 위치와 전화번호를 저장해놓는다. 내가 ‘한국인의 밥상’을 즐겨보는 이유는 그곳 특유의 독특한 이야기가 음식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의 밥상도 ‘喜怒哀樂’이 있다.     


  나의 밥상과 아버지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딸들에게 밥상머리 교육을 많이 하셨다. 좋은 의미로는 교육이지만 어떤 날은 잔소리로 들린다. ‘부모가 먼저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면 너희가 먹어도 된다, 농부의 노고를 생각해서 음식을 남기지 말아라, 소리 내어 먹지 마라,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숟가락을 내려놓아라.’ 등등이다. 그런데 그중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숟가락을 내려놓아라.’이다. 아니 더 먹고 싶은데 어떻게 숟가락을 내려놓는단 말인가?    

 

  아버지는 평소에는 공부하란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외공부도 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에 예비고사 수석을 하였다는 신문 기사가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 밥상머리에서 그 기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즈음엔 왜 그렇게 개천에서 용 나듯 불우한 환경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거나 예비고사 수석 합격한 학생이 많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다음부터는 그런 기사가 나온 조간신문을 보면, 그 신문을 아침 일찍 몰래 다른 방에 숨겨 놓았었다.      


  어쩌다 동생들이랑 싸움이 나면 그날은 자매들 혼나는 날이었다. 밥상을 앞에 두고 모두 둘러앉게 했다. 왜 싸우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고 앞으로의 다짐을 말하라고 했다. 훈육의 순서로, 첫째인 나부터 밥상 위에 올라가도록 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첫 번째 순서라 제일 세게 때렸으리라. 옆방에는 내가 좋아하던 밤톨 머리를 한 남학생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 학생이 화장실을 가면서 내가 맞는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매를 맞아 아팠던 게 아니라 너무 수치스러워 아팠다.   

   

  6학년 될 무렵까지 저녁밥을 먹고 치운 뒤 그 밥상에서 동생들을 둘러앉게 한 후 공부도 봐주고, 어머니를 도와 분담할 설거지 당번, 방 청소 당번을 정했었다. 그러나 꼭 정한 당번대로 동생들이 따라와 주질 않아서, 내가 대신하는 일이 빈번했다. 꼭 셋째가 규칙을 어기고 자기 당번이면 친구와 놀러 나가곤 했다. 화가 났지만 다른 방법이 없기에 설거지나 방 청소를 대신했다. 동생들은 간식거리를 놓고 늘 더 많은 것, 더 큰 것을 먹으려고 싸움질했다. 그러면 또 부모님께 대표로 내가 혼나니까 제일 나중에 남은 과일이나 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거실은 물론 TV도 없어서, 밥상 위에 라디오를 올려놓고 동생들과 함께 연속극을 듣는 일이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처음으로 생각나는 어머니의 밥상은 칼국수이다. 여름날 밀가루 반죽을 커다란 쟁반에 밀대로 밀어 동그랗고 얇게 만든 다음, 밀가루를 묻히고 계속 밀면 요술처럼 커다란 원이 만들어졌다. 칼로 예쁘게 썬 국수에 호박과 노란 달걀지단을 넣어 먹었던 칼국수는 별미였다. 간혹 밀가루 빵에 흑설탕을 넣어 찐빵도 만들어 주었다. 우리 집 김장은 보통 백 포기씩 했다. 김장하는 날이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왁자지껄 둘러앉아 칼칼한 동태찌개에 겉절이를 곁들여 먹었었다. 아주머니들이 입속에 양념이 들어간 하얀 속 배추를 넣어주면 주둥이가 시뻘게지도록 얻어먹었다.

     

  남의 집 밥상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상도동 살 적에 과외공부를 했었다. 아버지가 과외 팀을 만들었기에 꼽사리로 낀 나는 과외비를 내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 집에 갔는데 과외 시간보다 좀 일찍 갔다. 일본식 정원에 까만 코티나 자가용이 집 앞에 위엄 있게 세워져 있었다. 식사 시간이었는지 따로 칠보 밥상에 버터로 볶은 오므라이스를 내게 내왔다. 예쁜 그릇에 담긴 오므라이스라니. 맛도 기가 막혔다. 난생처음 맛보는 황홀한 맛이었다. 또 한 번 기억나는 남의 집 밥상이 있다. 6학년 무렵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 집에 갔는데, 친구 어머니가 짜장면을 시켜주었다. 그 집에서 담근 열무김치와 먹었는데, 막 익기 시작한 열무김치가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냉장고가 없어서 냉장고에서 막 꺼낸 그 집 김치가 너무나 충격적으로 맛있었던 거다. 그 후로 우리 집의 미지근하면서 시큼한 김치를 한동안 먹지 못했다. 사람 입이 이리 간사한 줄은 몰랐다.     


  오롯이 나를 위한 밥상을 받는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중3 때 청운동에 살았다. 집이 상도동이지만 아버지 학교 근처인 청운동 아파트로 잠시 옮겨 살았다. 중1 때부터 장학금으로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 다녔다. 청파동 중학교의 수업을 마치면 노량진 학원으로 갔고, 다시 청운동 집에 도착하면 거의 밤 10시다. 어머니는 늦게까지 공부를 마치고 귀가한 딸을 위해 쟁반에 맛있는 반찬을 챙겨놓으셨다. 식지 않게 아랫목 이불로 감싼 따뜻한 밥공기를 내어 주었다. 내 평생에 그때의 호사를 다시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호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 사정으로 어머니가 음식점을 내었다. 아버지는 퇴근하시면 어머니를 도와야 했기에 우리 자매와 떨어져 살았다. 대신 우리 집에 도우미를 보내주셨는데, 딸 다섯 등살에 오래가지 못했다. 자의 반 타의 반 내가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상가에서 장을 보고, 나와 동생들 도시락을 쌌다. 내 도시락은 둘로 나누어 점심과 저녁에 먹고, 늦게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면 주방에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김치나 밑반찬은 어머니가 보내주었지만, 늘 부족했다. 소풍 때면 알록달록 친구들의 김밥 도시락이 부러웠다. 수학여행 점심 도시락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볶음밥을 만들어봤다. 김밥은 왠지 자신이 없었다. 경주로 가는 기차에서 우리는 가스펠 송을 부르며 갔다. 점심을 먹으려고 양은 도시락 뚜껑을 열자, 누렇게 변색한 시금치 잎이 식은 볶음밥 위에 떡하니 위세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의 창피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도 동생들은 그때 큰 언니가 해준 밥상을 소환해낸다. 감자채 볶음과 오이무침이 맛있었다고.    

 

  84년에 유럽을 한 달간 여행한 적이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그 대학 기숙사에 사흘 동안 있으면서 거의 시리얼만 먹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한식을 먹으러 가자고 부채질했다. 왕복 3시간 걸려 지하철을 타고 런던을 다녀왔다. 오로지 한식을 먹기 위해서. 오랜만의 김치와 김치찌개로 포식했다. 나도 찌개가 나오기 전에 김치만으로 밥 한 그릇을 쓱싹 해치웠다. 오로지 김치를 먹기 위해서 런던까지 가는 건 좀 무리였다고 생각한다. 런던의 밤 지하철은 더럽고 무섭고 삭막했다. 그래도 김치 맛은 최고였다.     


  아버지는 폐암에 걸리셨다. 폐암이 생긴 곳은 수술하기 어려운 부위였다.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이사 날짜가 맞질 않아 우리 집에서 두어 달 함께 살며 항암 치료를 받았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남편이 직접 공수해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그 당시 유치원 다녔던 딸은 외할아버지를 위해, 매일 저녁 공연을 했다. 조그만 밥상 위에 올라가서, 공주같이 생긴 레이스가 달린 나의 분홍 잠옷을 입고는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를 맛깔스럽고 앙증맞게 불러 댔다. 춤도 곧잘 추면서 애교를 부리는 딸을 보고, 아버지는 너무나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발병 8개월 만에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우제 날, 눈이 펑펑 쏟아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회인 산기슭에 부는 바람은 눈물이 빠질 정도로 매서웠다. 큰 집 식구들이 아버지 산소 옆에서 불을 때어 육개장을 만들어 주었다. 뻘건 육개장이 목에 흘러내리는데, 까맣게 타 말라붙은 내 입술에 매운 육개장이 닿아 쓰려서 우는 건지, 매서운 바람이 너무나 추워서 우는 건지, 이렇게 슬픈데도 내 입에 들어온 육개장 국물이 달다고 느끼는 내가 미워선지, 그게 목구멍으로 이렇게 잘 넘어가도 되는 건지, 나는 밥을 먹으며 계속 울고 또 울었다.   

   

  2000년 10월에 캐나다 출장을 한 달간 갔었다. 정말이지 그날은 조갯살 넣은 시금치 된장국이 그리웠다. 쌀쌀한 날씨도 한몫했다. 홈스테이 호스트인 Linda 교장이 일식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때 먹은 스시와 된장국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찌나 개운했던지 된장국을 몇 그릇이나 먹었다. 아니 들이켜댔다. 그날 저녁 한식이 생각난 김에 중국 배추와 멕시코 고춧가루로 김치 겉절이를 그녀와 만들었다. 국적 불명의 김치 겉절이를 그녀와 그녀의 남편 Neil이 맛있다며 잘 먹었다. 요리 하나를 만들어 식탁에 올리면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Thank you! ”

  라며 감사를 연발하던 그녀의 남편. 그래야 다음에도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었다.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6개월 앞두고 코로나가 퍼졌다. 그때부터 교장실에서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밥을 먹으며 SNS 활동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다. 혼자만의 밥상을 즐기기 시작했다. 요즘도 골프 연습이 끝나면 혼자 버거와 콜라를 사 먹거나, 샐러드와 빵을 먹으며 여유를 부린다. 좀 더 사치를 누리고 싶은 날은 스파게티, 빠에야, 혹은 터키 콩 요리를 먹기도 한다. 그야말로 밥상의 세계화이다. 남편은 서양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니, 혼자만의 밥상에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맘껏 사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름이면 밥상에 된장찌개와 열무김치를 자주 올린다. 청양고추가 적당히 들어가고 우렁이를 넣은 된장찌개, 그리고 막 익기 시작한 열무김치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는 밥상이다. 아버지가 드시던 방식으로, 된장찌개와 열무김치를 보리밥에 썩썩 비벼 먹는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들린다.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숟가락을 내려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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