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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Jan 07. 2023

짜장면과 산울림

여름이 시작되었다. 버스를 타고 남대문에서 내려 가파른 남산 언덕을 올라가는 길, 무더위로 숨이 턱 막혀왔다. 녹음이 짙은 산 중턱의 공원에서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 무리가 보였다. 조금 살펴보니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듯 보였다. 

  “야! 너희들 왜 여학생들을 괴롭혀? 너희 학교에 연락해야겠다.”

  “아줌마, 나 어제 잘렸어.”

  “나도 잘렸거든. 학교에 연락해서 알아봐, 아줌마! 히히”


  나는 그 당시 대학교 4학년 교생실습 중이었고, 후암동에 사는 재일교포 초등학생의 한글을 가르치려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이었다. 참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여학생들이 남학생의 괴롭힘을 피해 도망가려는 모습에 문득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여학생들이 나의 참견을 반길 줄 알았는데, 웬 불청객이 끼었나 하는 뜨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였다. 남학생에게 물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여학생이 자기도 잘렸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노려봤다. 그들의 놀이에 잘못 끼어들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뒤에서 여학생들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들리자,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았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지만, 교실에서 정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은, 교생실습이 처음이었다. 성수중학교에 배당되어 영어 과목을 가르치고 담임교사 보조역할도 하였다. 푸른 하복을 입은 학생들이 수업 중일 때에는 순수했지만 남학생들이라선지 짓궂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퇴근하면 한 무리의 남학생이 내 뒤를 미행하는 일이 많았다.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면, 재빨리 가게로 들어가거나, 자전거 뒤로 숨었다. 나 말고 다른 교생도 우리 반에 배당되었다. 그 친구는 얼굴도 예쁘지만, 집이 부유해서 매일 예쁜 옷으로 치장하고 학교에 왔다. 실습이 끝날 무렵 학생들의 편지를 받았다. 

  “박찬미 선생님은 검소하고, 영어 발음도 좋고, 잘 가르친다.” 

  라고 쓴 내용이 많았다. 예쁜 그 교생을 모두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예쁜 옷을 살 형편이 아닌 나는 의기소침해서 다녔는데, 학생들의 편지로 큰 위로가 되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지자 자기도취에 빠졌었나 보다, 교복을 입은 학생을 보면 교생실습 중인 내가 마치 선생님이 된 듯 섣불리 가르치려 했다. 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가르친다는 위치에서의 자만심이 나도 모르게 생겼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면 당연하게 내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던 걸로 생각했던 거다.     

 

  어찌 된 영문인지, 학생들이 우리 집 이삿날을 알게 되어, 잠실의 아파트로 몰려왔다. 아침부터 대여섯 명이 와서는 이삿짐을 나르겠다는 거다. 다들 체육복 차림으로 중무장하고 왔다. 순간 당황했지만, 포장 이사가 없던 시절이라 일일이 짐을 싸서 날라야 했는데, 학생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물론 점심은 짜장면이었다. 그때 먹은 짜장면만큼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을까? 학생들을 우리 가족에게 일일이 소개해주고 기념사진까지 찍고는 헤어졌다. 살림살이 모두가 공개된 날이었지만 유쾌한 하루였다.     


  마 바지를 입고 간 날이었다. 살짝 비치는 바지인 줄 깨닫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내가 지나칠 때마다 ‘산울림’의 노래를 부르는 거였다. 

  “너와 난 주황 풍선. 하늘 높이 날아.”

  아! 바지에 살짝 주황색 속옷이 비친 거였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긴 하루였는지 퇴근 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렸었다. 치마를 입고 온 날은 계단 밑에서 고무줄로 만든 새 총을 쏘려고 몇몇 학생이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채고 얼른 먼저 나오라고 재촉해서 그 사단을 피할 수 있었다.     


  성수동은 그 시절 공장들이 많았던 지역이고, 다닥다닥 집이 붙어 있어, 출입문도 찾기 어려운 아주 협소한 주택이 많았다. 궁핍한 시절과는 다르게 너무나 변해서 지금은 카페와 수제화 거리로 바뀌었다. 지금은 모두 중장년층이 되었을 그 친구들, 내 뒤를 미행하던 익살스럽고도 유쾌하고 정이 많았던 그 시절의 성수 중학교 학생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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