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려는데, 호텔 전화의 벨이 울린다. 좀 전에 하우스키핑에 전화를 해서 방을 환기하려는데, 문을 어떻게 열지 물어보니, 설명하기 어려웠던지 직원이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것 때문인가? 왜지?
“ Mrs Park? ”
“ You have to pay more money. ”
아니 늦은 밤에 이건 또 무슨 홍두깨 두드리는 소리인가? 숙박비에 대해서는 메일로도 문의하고, 체크인 때 계산하면서 분명하게 매듭을 지었는데. 황당해서 조목조목 따졌다. 승무원 가족은 숙박비 10% 감면 혜택이 있어 그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래도 뭐라 하기에, 그럼 딸아이를 데리고 지금 ID를 가지고 내려가겠다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상대방에서 갑자기 웃는 게 아닌가? 이건 또 무슨 상황?
“ 엄마! 딸 목소리도 몰라? ”
아! 딸이었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허스키여서 전혀 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일본 여행 마치면 다음 날 설날이어서, 급하게 시장도 보고 미리 전이며 나물도 만들어 놓고 일본서 돌아오자마자 설 준비하느라 넋이 나갔다. 그리곤 곧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도쿄와 하와이가 연속으로 여행이 잡히니 호텔로 문의한 것도 헛갈리고, 정신없었던 건 사실이다. 딸의 목소리까지 알아보지 못하다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장난 전화인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차분하지 못한 나!
뭐든 성질 급한 나는 예전부터 실수를 많이 했다. 시험을 보면 ‘00 하지 않은 것은?’이라고 묻는 것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00인 것’으로 고르고는 제일 먼저 시험지를 내고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늘 시험지를 제출할 때는 만점을 자신하고 나온다는 거다. 교장 자격시험에서는 예시 문제를 미리 주었었는데, 정작 출제된 것은 예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문제를 읽어보지도 않고는 시간 모자랄까 봐 미리 준비한 답안을 속사포처럼 써 내려갔다. 세월호가 일어난 해라서 ‘안전’에 대한 것이 당연하게 나올 줄 알았던 거다. 외출할 때도 대부분 남편이 아내를 기다린다는데, 오히려 내가 남편을 기다린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다 보니 엘리베이터 눌러놓고, 남편 기다리다 세월을 다 보냈다. 그 덕에 흰머리가 늘었다고 투정을 부린다.
오늘은 거북이 스노클링 투어가 있는 날이다. 거북이처럼 여유롭게, 차분하게 살고픈 마음에서 아침부터 나를 성찰해 보았다. 일 인당 16만 원씩, 마이리얼트립에서 미리 한국서 예약했다. 호텔 픽업 포함이다. 전날 카톡으로 픽업 장소 등 상세한 연락을 받았다. 예로부터 배에 바나나를 가지고 타면 사고가 나는 징크스가 있다고 하니 간식으로 바나나는 삼가 줬으면 좋겠다는 안내가 눈길을 끈다.
멀미약을 준비해서 딸과 먹었다. 요트의 진동이 심하다고 미리 안내받았다. 10시에 호텔 로비로 나가 현지 여행사 직원을 만났다. 날씨가 흐리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비가 후드득 물속으로 딱총처럼 떨어진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오리발, 스노클링 장비, 구명조끼를 착용했다. 딸은 수중 촬영을 위해 고프로를 30불에 렌트했다. 바다로 들어가려는데, 여기서 또 급한 성미가 작동했다. 사다리를 다 내려가서 차분히 들어가면 될 것을 몇 계단 남겨두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스노클링 장비를 입으로 물고, 물속으로 냅다 박히니 숨을 못 쉬겠다. 옆의 딸이 걱정하며 나를 거들었다. 장비를 빼고 숨을 쉬고 내쉬라고
“하나! 숨 쉬고. 둘! 내쉬고.”
교관처럼 명령하는 딸! 그대로 따라 하는 수밖에. 조금 지나니 편안해졌다. 안심이 되면서도 고마웠다. 딸이 이렇게 의지가 되다니, 웃음도 나오고. 딸은 이 일을 두고두고 이야기하겠지? 자기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스노클링은 수없이 해보았는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나이 들면서 점점 둔해지는 걸까?
"엄마는 몸으로 뭘 하는 건 힘들어. 머리를 쓴다면 모를까?"
바닷속은 갖가지 물고기들로 가득 찼다. 다른 세상으로 초대받았다. 인어공주의 ost로 나오는 ‘Under the sea’ 가사가 귀에 맴돈다. 인간 세상은 엉망이에요. 바다 밑 세상이 땅 위 세상보다 어떤 방면에서든 더 낫다고요. What more is looking for? 그래! 더 뭘 찾겠어? 하하! 여유로운 세상이지. 환영합니다! 물은 차지도 않고 온화했다.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태초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착각이 든다. 조금 지나자 거북이 한 마리가 보였다. 이 친구 옆에서 한동안 맴돌았다. 내게 말을 건넨다. 거북이의 까만 점도 따라 움직인다.
“ 이 먼 곳까지 애써 나를 만나러 찾아왔네? 바쁘게 사느라 힘들었지? 어서 와. ”
아! 갑자기 울컥해진다. 한가로운 이 시간. 얼마 만인가? 입에 문 스노클링 장비를 다시 꽉 물었다. 목울대부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서다.
갑자기 사람들이 왁자지껄 몰려와서 사진 찍느라 난리다. 거북이를 발견해서다. 조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아까보다 더 큰 주황색 점이 박힌 거북이가 보인다. 위풍당당한 거북이! 옆으로 다가가도 피하지를 않는다. 오늘따라 더욱 고귀해 보이는 거북이. 바다거북은 민담 등에서 '용왕의 심부름꾼' 등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간혹 바다거북이 그물에 걸리거나 바닷가에 올라와서 잡혔을 경우, 일부 어촌 지역에서는 용궁의 사자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며 막걸리 한 잔을 먹여서 방생하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연안에서 물고기 잡는 그물에 혼획되거나 좌초, 표류해 죽은 바다거북 34마리 중 28마리가 해양 플라스틱을 먹은 것으로 확인되었단다. 하루에 사라지는 지구의 생물이 200개라고 들었다. 50년 사이 지구상의 생물 68%가 사라졌다. 환경 이론 따로, 일상 따로가 아니라 정말 플라스틱 프리를 위해서 실천해야겠다. 사랑하는 손주가 태어나면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사는 생물들을 모두 보여주고 싶다. 사라져 가는 것들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 인간이 노력하면 되는 것을.
고프로로 수중 촬영도 하고, 딸과 번갈아 사진도 찍었는데, 조금 떨어져 있던 남편의 안색이 좋지 않다.
“ Hey, help me! Please take him to the yacht. ”
진행요원이 재빠르게 요트로 데려갔다. 걱정되어 나도 요트로 이동했다. 남편은 바닷가 사람이어서 걸음마보다 수영을 먼저 배웠을 정도인데, 의아했다. 오리발을 끼니 불편했단다. 가이드가 오리발을 필수로 끼게 한 게 남편에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딸이 남편의 나이를 이야기하며 가이드에게 신경 써달라고 하니 “늦둥이”라며 딸을 놀린다. 늦둥이 맞지! 남편과 내 나이를 알고는 깜짝 놀란다. 둘 다 머리를 염색해서 위장술을 쓴 걸 몰랐던 거다.
옆에 도쿄에서 온 젊은 여자팀이랑 수다 떨고 무스비와 컵라면을 먹었다. 바닷가에서 나오니 무스비와 따스한 라면 국물이 찰떡궁합이다. 바다수영 후의 커피믹스 맛은 또 어떻고? Gary라는 청년 가이드가 유쾌하다. 30대 초반 부산 청년은 어떻게 이곳 하와이에서 거북이 체험 가이드가 되었을까?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가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멀리 다이아몬드 헤드가 보이는 곳에서 한 팀씩 기념촬영을 했다. 벌써 요트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남편과 딸은 바다 위로 떠올라 숨 쉬는 거북이도 봤다고 한다.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다. 아쉽다. 다음에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 선장과 진행요원을 위해 10불 팁을 주었다. 신혼부부 포함 15명 정도 셔틀을 타고 이동, 각자가 묵는 호텔에 내려주었다.
거북이를 만나 둘만의 비밀대화를 한 것이 경이로웠다. 문명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바닷속 세상이 하나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곧 그쳤다. 그렇다고 활짝 갠 날은 아니어서 안타깝게 하와이 명물인 무지개를 놓쳤다. 하지만 딸이 내 생명을 구해 준(?)것도 고마웠고, 가족애로 뭉쳐 서로를 걱정해 준 따스한 날이었다. 다이아몬드 헤드가 보이는 요트 안에서의 가족사진이 거실에 걸려 그날의 추억을 말해준다. 앞으로 내가 갖게 될 달력은 또 무엇으로 채워질까? 앞으로 맞을 세월에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후회할 일들이 또 생길 것이지만 생의 찬란한 빛이 스미도록 노력하면서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하와이 편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