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종일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질 않았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고도 있었지만, 달구어진 거리에서 마치 통닭처럼 서서히 구워지는 듯한 느낌이 싫었다. 집 밖을 굳이 나가지 않아도, 택배와 배달 음식 그리고 시원한 에어컨이 있지 않은가? 예전엔 왠지 꺼림직하게 느껴졌던 계란, 소고기도 택배로 시켜 먹는다. 아이도 말을 배울 시기에 “엄마”, “아빠”, 다음에 배우는 단어가 “택배”란다. 코로나 시대를 거쳤기에 집안의 생활에 적응이 잘 되어 있다 보니, 남과 어울릴 필요도 없고, 바깥세상이 가져다주는 피로가 오히려 버겁기만 하다.
40여 년 전 잠실 장미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 자양동 연립주택에 잠시 살았었다. 어느 날 밤 왠 남자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아래층 산다면서
“연립 사는 주제에 왠 에어컨? 아래층 시끄럽고 더운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남자가 한풀이하듯 혼자 떠들다가 내려갔다.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의 고급 휴양지로 알려진 이탈리아 해안마을 포르토피노에서 에어컨을 둘러싼 주민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당국이 에어컨 설치를 단속하자 주민들이 서로를 신고하고 나섰다고 한다. 이곳은 193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건물에 에어컨 설치하는 것이 불법이란다. 불법 설치 혐의로 기소되면 한화 약 6400만 원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단다. 파리올림픽에서도 친환경을 이유로 선수촌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에어컨이 사치품이란 인식이 강하다. 도시미관을 이유로 구청허가를 받아야 하고 소음으로 같은 건물 주민 동의가 있어야 한다.
몇 년 전 여름의 남프랑스는 무더위로 여행 다니기 불편했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고흐의 밤의 카페로 유명한 아를에서 자유시간을 가졌지만, 얼마 후 다시 패키지 버스에 올랐다. 가는 카페마다 에어컨이 없어 무더웠기 때문이다. 조그만 갤러리나 상점, 의류점, 음식점 모두 에어컨이 없었다. 애플 전시장에 들어서니 빵빵한 에어컨이 있어서 살 것 같았다. 에어컨에 익숙해져서 더위에 대한 내성이 약화되었나 보다. 에어컨은 영어로 Air Conditioner이다. 에어컨은 내부의 더운 공기를 냉매를 통해 흡수한 뒤에 다시 실외기를 통해 외부로 배출한다. 실내의 열기를 밖으로 빼내는 것이다. 결국 내 공간에서 빼낸 열기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열기를 더한다. 그래서 지구가 과열된다. 환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리함에 익숙해서인지, 에어컨도 배달 음식도, 택배로 나오는 플라스틱도 줄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노천강당에서 예배를 보거나, 조회할 때, 학생들이 부채질하면 교장 선생님은 늘
“조그만 신체의 일부인 얼굴 하나를 시원하게 하려고, 온몸 전체를 흔들어서야 되겠나?”
하셨다.
우리는 내 집만 시원하게 하려고 온 지구를 불볕으로 만들고 있다.
예전에 국민학교 시절 동작구 상도동에도 우물이 있었다. 여인네들은 그곳에 모여 빨래하고, 열무김치 다듬은 것을 씻기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두레박을 끌어 올리며 서로 등목도 해주고, 우물가는 동네 소식을 전하는 정보통이기도 했다. 무더위로 대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살다 보니, 이웃집 부부싸움도 보고 듣고, 대가족이 함께 살다 보니 좌충우돌 별의 별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자라났다. 아이들은 의사소통하는 법, 양보하고 배려하는 법, 위 아랫사람에게 존댓말도 배우고, 처신하는 법을 저절로 배우게 되었다.
이제는 참외밭에서 갓 따온 참외를 개울에 씻어 시원한 원두막에서 먹던 참외 맛을 맛있다고 느낄지 의문이다. 시장에 간 엄마의 장바구니를 기다리는 즐거움도 모를 것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냉장고에서 갓 꺼낸 열무김치를 처음 먹어 보았다. 짜장면과 함께 먹은 그 시원한 열무김치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 후론 우리 집 쉬어 빠진 열무김치 먹는 게 고역이 되었다. 그것처럼 예전의 맛과 즐거움은 점점 새로운 것, 편리한 것에 잠식되어 간다. 이를 어이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