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심고 간 봄

by 박찬미

나는 남편이 꽃에 무심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딸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는 외투 품속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내 내밀었다. 예고보다 일찍 시작된 수술 탓에 남편은 뒤늦게 도착했고, 나는 못내 서운함이 차올라 있었다. 하지만 추위가 개학마저 늦추던 그 시린 아침에 그가 어디서 이 붉은 꽃을 구해왔을까 생각하니, 차갑던 마음은 눈 녹듯 풀렸다. 꽃잎보다 더 붉게 상기되어 있언 그의 두 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첫 결혼기념일에도 그는 꽃을 건넸다. 빨강, 노랑, 분홍색이 어지럽게 섞인 투박한 조화가 어딘가 어설퍼 웃음이 터졌지만, 그 서툰 색감마저 꼭 그의 마음결 같아 애틋했다.


효자였던 그는 계절마다 꽃으로 어머님의 산소를 단장했다. 봄에는 철쭉과 작약을, 여름엔 금잔화와 접시꽃을, 가을이면 노란 국화를 심었다. 꽃씨를 갈무리하는 손길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정성껏 씨앗을 말리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정갈한 의식을 치루는 수행자처럼 차분했다. 길가에 꺾인 유채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뭇가지로 가만히 받쳐 세워주던 사람. 그는 그렇게 꽃을 그리고 생명을 아끼는 이였다.

몇 해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그는 눈 쌓인 석촌호수를 아내와 걸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도 호수 근처 학교였다. 첫눈 오는 날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도 그는 다시 아내와 그 호수를 걷고 싶다고 했다.

삼 년 뒤 벚꽃이 눈부시게 흩날리던 석촌호수를 그와 다시 걸었다. 병원에서 입원을 권유받은 날이었다. 사방은 온통 흰 꽃의 궁전 같았으나, 내 마음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입원을 거부하던 그의 단호한 뒷모습 앞에서, 나는 그 결심을 붙잡아야 할지, 보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날의 봄꽃은 끝내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해 이맘때, 산수유 노란 나무 그늘 아래서 그는 사진을 찍었다. 두 달 여의 간병 끝에 기적같은 차도가 보였다. 시동생이 보내 온 홍어를 달게 먹고, 포천 나들이도 다녀오며 나는 그의 회복을 간절히 믿었다, 어머님 산소에 제비꽃과 냉이꽃이 피었다. 작약에 분홍빛이 돌기 시작할 무렵, 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 주치의가 일반병동으로 와서 인사를 건넸고, 그는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그 미소는 산수유를 닮아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노란 별처럼 피어나는 꽃. 나는 그가 다시 봄을 맞을 것이라 믿었다. 보름 뒤, 그는 노란 별 하나가 되어 멀어졌다.


이제 나는 또 다른 신비의 꽃과 함께 산다. 딸이 낳은 내 손주다. 아이의 서툰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경이롭다. 손주를 처음 마주하던 남편의 눈빛이 떠오른다. 아이가 집에 와 잠을 청할 때면 그는 낮게 자장가를 불렀다.

옆집 개도 잠이 들고,

뒷집 닭도 잠이 든다.

우리 아기 잠을 자거라

엄마 품에 잠을 자거라

달도 밝고 별도 밝아

이 밤 깊어 고요한데

우리 아기 왜 못 자나

엄마 마음 애가 탄다

그 노래가 구슬퍼서였을까. 할아버지의 자장가에 손주는 곧잘 눈물을 터뜨리곤 했다. 이제는 내가 이 노래를 부르면, 아이는 “허이!”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재롱을 떤다. 병상에서 있을 때 영상통화를 할 때면, 남편은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화면 가득 연신 입을 맞추곤 했다. 내 무릎에 앉아 함께 책을 읽거나, 알 수 없는 말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그는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바다 수영을 꼭 가르쳐 주고 싶다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손주의 돌잔치에 담당 의사가 참석해도 좋다고 했던 날이 있었다. 너무나 기뻐하던 그에게 수간호사는 병원 규정상 외출이 어렵다고 전했다. 그때 각서라도 쓰고 함께 갔더라면 어땠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한 달 뒤에 떠날 길이었다면, 그 짧은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손주의 얼굴을 보게 했더라면. 청진기를 잡고 의젓하게 서 있던 그 작은 모습을.


아파트 창문 너머 산수유를 바라보다가, 나는 그가 남긴 금잔화 꽃씨를 찾는다. 방치해 두었던 빈 화분에 씨앗을 심는다. 정성껏 물을 주고, 볕을 쬐어 주며 사랑으로 키워내리라. 훗날 노란 꽃이 피어나면 손주에게 가만히 들려줄 것이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꽃을 사랑했는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 꽃처럼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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