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 낡은 의자가 두어 개가 마중을 나온다. 그 곳을 지날 때면 그는 늘 통과 의식처럼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보, 여기 잠깐만 쉬었다 가세.”
그 투박한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나란히 앉아 숨을 고르곤 했다.
요즘도 그 의자 앞을 지나칠 때면 바람결에 실려 온 그의 억양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나는 주인이 없는 빈 의자 앞에서 그가 남긴 말투를 그대로 빌려 나지막이 읊조려 본다.
“여기 잠깐만 쉬었다 가세.”
대답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끊겼던 대화가 다시 흐르는 듯하다. 어느덧 우리의 다정한 이야기는 그렇게 오롯한 나의 혼잣말이 되었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소쩍새가 운다고 했다. 소쩍새가 울 때면 그는“뾰르르릉 뿅”하고 새 소리를 흉내 냈다. 그러면 새는 제 동무라도 만난 양 잠시 울음을 멈추고 반갑게 화답하곤 했다. 신통하게도 그런 교감이 여러 번 이어졌다. 그는 매미 중에도 ‘으짱 매미’라는 놈이 있다며, “으짱, 으짱”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제는 나도 그를 따라 새 소리와 매미 소리를 흉내 내 보지만, 번번이 엉뚱한 소리만 공중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는 산 짐승들의 갈증까지 염려하던 사람이었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산에 짐승들이 마실 물이 없다며 생수를 챙겨 산으로 향했다. 고양이와 새들을 위해 조심스레 물을 따라 놓고 돌아오던 길, 그의 얼굴은 겨울 햇살보다 환하게 빛났다. 퇴직 후 술을 끊고 나서는 나와 보내는 시간이 부쩍 깊어졌다. 외출하고 돌아와 내가 풀어놓은 시시콜콜한 세상사들을 그는 묵묵히, 그러나 가장 다정한 청중이 되어 들어 주었다.
어느 밤 꿈에서 그를 만났다. 밀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털어놓다 설핏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보, 실은 난 그 남자를 잘 몰랐어. 어디서 만났는지조차 가물거렸거든. 그런데 대학 삼 년 내내 그가 내게 편지를 보냈지 뭐야. 학과 편지함에 하루 한 통, 어떤 날은 서너 통씩 쌓여 있던 하얀 봉투들. 처음에는 호기심에 읽었지만, 군인이 보낸 편지엔 별다른 내용은 없었어. 대부분 봉투를 뜯지도 않고 버렸지.”
나는 숨을 고르며 기억의 타래를 더 깊이 풀었다.
“아! 이제야 생각났어. 고등학교 때 다니던 교회에서 만났던 사람이었지. 어느 날 휴가를 나왔다며 집으로 전화가 왔기에 죄책감에 못 이겨 나갔어. 계림극장에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봤던 것 같아.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이라는 건 선명한데, 영화도 그 사람도 내겐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 한창 발랄하던 시절에 낯선 남자와 전쟁영화라니. 결국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나와버렸던 기억이 나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뒤였어. 이상하지? 당신은 내 곁에 숨쉬는 것 같은데 세상은 자꾸 당신이 없다고 말하더군. 그때 SNS 친구들이 위로를 보내왔어. 전혀 모르는 이들부터 교육계 선배까지, 밥 한 끼 사주겠다는 호의가 쏟아졌지. 개중에는 치근거리는 이들도 있어 마음의 문을 닫으려는데, 유독 낯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띄었어. 사진 속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온화한 선교사의 모습이었어. 멕시코 오지에서 사역한다는 그 목사님은 내가 소녀 시절 꿈꾸던 그 길을 대신 걷고 있었지. 오십 년 전, 줄행랑을 쳤던 철없던 여대생에게 도착하지 못한 편지들이 반세기 만에 안부가 되어 돌아온 셈이야.”
세상은 참 넓고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잠결에 남편이 기지개 켜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아니 들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나누던 대화들이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울 줄이야. 오십 년 세월을 돌아 온라인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도 있는데, 정작 평생을 함께한 내 사람은 이제 오직 꿈길에서만 만날 수 있다.
문득 황진이의 시구가 마음을 스친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내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그녀의 시처럼, 밤마다 어긋나지 않고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으니 그 또한 다행이라 여겨야지. 오늘 밤에도 나는 빈 의자에 고여 있는 우리의 수많은 이야기를 가만히 보듬으며 그가 올 꿈길을 마중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