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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미 Oct 27. 2022

최초의 외박 사건

영문을 몰랐던 그 시절

 “러브 포션 넘버 나인”

  60년대 유행하던 팝송이다. 라디오를 틀면 이 노래가 많이 나왔다. 둘째 이모가 우리 집에 오면 늘 이 팝송을 흥얼거리고, 이상한 춤을 추었다. 우리 자매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 팝송을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이모처럼 개다리춤을 추곤 했었다. 이모가 오면 늘 집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성대모사도 잘했고, 흔히 말하는 끼가 있었다. 그 시절 만나는 남자가 있었는데, 데이트할 때면 꼭 초등학생인 나를 데리고 나갔다. 만나서 주로 한강을 거닐었다. 오래전 60년대는 한강 변 자체가 거대한 해수욕장이었다. 여름이면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겨울이면 또 그곳에 커다란 스케이트장이 들어서서 당시 서울에 살던 사람들은 멀리 갈 필요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한강 다리는 한강철교였다. 노량진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한강 다리! 중학교 1학년 때 시험을 보고 일찍 하교하면서, 나보다 두 뼘이나 큰 친구 성희와 청파동 학교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 노량진까지 걸었었다. 한강 다리는 무척이나 길었다. 주변에도 우리처럼 걷는 이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얼마 전 결혼한 딸이 한남동에 살아서 가끔 성수대교 근처를 지나가게 된다. 이곳이 서울 야경 명소라고 한다. 한강과 남산 그리고 성수대교와 롯데월드타워의 밤 조명이 매우 화려하다. 한강에서 유람선도 타고, 요트도 탈 수 있다. 한강 다리도 32개라고 한다. 나도 어린 딸아이와 함께 유람선을 타고 한강을 즐긴 날이 있다. 1994년 10월 21일 한강 성수대교의 중간 부분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며, 현장을 지나던 시내버스와 차량이 그대로 추락했다. 발생 시각이 아침 출근 및 등교 시간이라 등교하던 학생들을 비롯해 출근하던 직장인과 교사 등 평범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학 여중 학생 1명과 무학 여고 학생 8명이 이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중이었다. 꽃다운 어린 학생들의 죽음과 한강은 지금까지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그때 별일 없이 한강 다리를 건넜다면, 지금 40대 중반의 어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또래의 사춘기 여고생을 딸로 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측될 수 없었던 일!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물론 생명과 관계될 만큼의 큰일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충격이 매우 컸다. 그 일은 한강 다리와도 관련되어 있다.   

  

  중학교 다닐 때 학원을 3년 내리 공짜로 다녔다. 우등생을 홍보하려고 다니게 했던 것 같다. 상도동 집과 가까운 장승배기에 C 학원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전근이었는지, 무슨 이유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청운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아파트가 막 붐이 일던 시절이었는지, 우리도 아파트라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래도 장승배기의 학원을 계속 다녀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갔다가 9시가 넘어서 버스를 탔다. 청운동 집으로 밤 10시가 넘어야 귀가했다. 학원에서 시험을 보면 석차가 1등부터 20등까지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 놓았다. 자존심 강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나는 치열하게 공부했다. 저녁에 만나는 학원 선생님은 현직 중학교 선생님도 있었다.   

   

  어머니는 늦게 귀가하는 딸을 위해 아랫목에 밥그릇을 넣어 두었다가 나만을 위한 밥상을 쟁반에 차려주곤 했다. 혼자만의 밥상을 받아본, 내 인생 최고의 호사를 누렸던 시절이었다. 아파트 구조가 방 두 개에 화장실은 바깥 공중화장실을 썼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아침이면 뜨거운 물을 쓰기 위해 커다란 솥에 물을 데웠다. 어떤 날은 데운 물이 나한테까지 차례가 오질 않았다.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가 기름을 발라 놓은 떡처럼 딱 붙어 다니는 날이 많았다.     


  동생들은 근처의 인왕산과 북악산을 자주 놀러 다녔다. 나는 주말에도 고등학교 입시 준비로 체력장 연습을 했기 때문에 산에서 놀았던 기억이 거의 없다. 학원 근처 인근의 노량진 초등학교에서 체력장 연습을 했다. 제일 잘했던 것은, 도움닫기 멀리 뛰기였다. 뛰다 보면 가속도가 붙어 새처럼 붕 떨며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윗몸 앞으로 굽히기는 전혀 되질 않아 늘 마이너스 기록이었고, 보라색으로 다리가 멍들어 있기 일쑤였다.      


  중학교 때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영어였다. 전교에서 최고 성적이 나올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영어 선생님이 바뀌었는데, 수업 시간에 자습서에서 나오는 것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

  “be + ing! 현재 진행형이지요.”

  지속되는 그 소리와 말투에 갑자기 짜증이 확 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선생님, 매일 똑같은 말씀만 하세요? 현재 진행형은 우리도 다 알아요. 시험에 나올만한 것을 지도해주셔야지요?”

  느닷없이 선생님께 대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친구들이 나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야! 너는 다 아니까 그러잖아.”

  갑자기 머쓱해진 나는, 오기가 작동했는지 갑자기 책가방을 챙겨 집으로 갔다.


  그날도 여전히 학원 수업이 끝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간식으로 무엇을 조금 먹긴 했지만, 배가 고팠다. 갑자기 버스에 무장한 군인들이 올라와서는 다들 내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내렸다. 사람들 말로 한강 다리가 폭파했을 경우를 대비하는 작전을 수행한다고 했다. ‘왕거미 작전’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교복을 입은 여자 중학생이라 신경이 쓰였나 보다. 어떤 제복을 입은 사람이 따로 나를 불러 커다란 건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은 용산 전화국 국장실이란다. 매우 높으신 분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 학교며, 집 주소를 물으셨다. 국장실 소파에서 자면 내일 학교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집엔 전화가 없어서 연락하지 못하였다. 자는 둥 마는 둥 소파에서 누워, 방을 이리저리 살피고 천장만 쳐다보았다.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그 방은 갈색 가죽으로 된 소파와 탁자 그리고 철제 캐비닛이 흉물스럽게 있었다. 문이 열려있어서 누군가 방 안으로 쳐들어올 것만 같아 무서웠다. 밤이 이렇게 긴지 몰랐다. 교복을 입고 잠을 자려니 불편하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걱정하실 부모님 생각도 들었다. 집에 가고 싶었고 무서웠다. 내일 아침에는 똑같은 일상이 펼쳐질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뒤척거리다가 보니 새벽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빵과 우유를 주었다. 얼마 후 관용차로 청파동의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위엄 있게 생긴 까만 차가 매우 낯설었다. 전화가 없어, 소식을 알 길 없었던 부모님은 밤잠을 설치셨다고 한다.     


  며칠 후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셔서 교무실로 갔다.

  “아야! 얼매나 놀랬냐아? 큰아빠한테 소매치기당했으면 당했다고 할 일이지. 쯧쯧. 담부턴 쬐끄만 일이라도 큰아빠한테 얘기하거래잉?”

  하시며 학생증을 주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다. 늘 자신이 나의 큰아빠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그날 용산 전화국에 제출했던 학생증이 며칠이 지난 후 학교로 온 거였다. 자세한 말씀을 드려봤자 놀랄 것 같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968년 북한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했던 사건이다. 늘 청운동 우리 아파트 앞에는 삼엄한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었고, 무장군인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던 생각이 난다. 그날 외박을 해야 했던 날, 나는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몰랐다. 무방비 상태로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연못에 있던 개구리가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맞은 듯 당황했을 뿐이다.

  ‘미국은 1960년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북한군의 남하를 막으려고 모든 한강 다리를 전술핵무기로 파괴할 작전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60년대 한강을 검색해보면 나오는 기사이다.      


  아직도 나는 진실을 모른다. 다만 짐작과 추측으로 그러려니 하며 살았던 나날들이 많았다. 지금 세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그때는 많이 일어났었다. 대학 다닐 때, 또래 남학생들이 명동거리를 걸어가다가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붙잡혀 들어가 머리를 이상하게 잘려 나왔다.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번잡한 명동을 혼자 걸어가는데, 뒤에서

  “야! 너 머리가 왜 이리 길어?”

  하며 나를 불러 세웠다.

  “저는 여자인데요?”

  “여자가 왜 남자처럼 하고 다녀?”

  죄인처럼 인사를 급하게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온 적이 있다. 머리를 짧게 커트하고, 유행하던 ‘당꼬’ 바지를 입은 뒷모습이 남자로 보여 착각했나 보다.     


  교사 초임 때는 공무원 정신교육 연수를 가야 했다. 학교당 의무적으로 몇 명이 배당되었다. 기혼 선생님보다는 미혼이며 나이 어린 내게 당연히 순서가 먼저 떨어졌다. 숙박하면서 거의 일주일을 연수원에서 지냈다. 준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생리가 터졌다. 밖으로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옛날 수위 아저씨, 지금으로 치면 주무관에게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그분이 퇴근하면서 맞은편의 담벼락에서 위생용품을 던졌다. 가끔 간식도 그런 식으로 몰래 부탁했다. 6박 7일간의 연수가 끝나고 광화문 거리를 나왔다. 유인물이라도 들은 줄 알았는지 경찰이 불룩한 가방 속을 보여 달라고 했다. 가방에는 갈아입을 옷이며 속옷이 들어 있었다.

  “저는 공무원입니다. 공무원 정신교육 마치고 나오는 길이에요, ”

  라고 푸념 섞인 대꾸를 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인상을 봐서 신분증을 보여달라고도 했다. 신혼 초에 남편과 남이섬에 놀러 가려고 시외버스를 탔다. 무장군인이 버스에 올랐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남편에게 다가왔다. 그에게 다가와서는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얼마나 인상이 고약하길래 신분증 검사에 뽑혔냐고 남편을 놀려댔었다.   

  

  교육 현장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는 관악산에 송충이를 잡으러 나갔다. 병에 가득 송충이를 나무젓가락으로 잡아서 선생님께 냈다. 온종일 송충이를 잡느라, 공부하지 않은 건 좋았지만, 소나무에 득실득실 포진해 있는 송충이는 정말 징그러웠다. 송충이 잡은 날은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가지가지마다 송충이가 기어 나오는 꿈을 정말 많이 꾸었다. 고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열어 보리밥 검사를 했다. 보리쌀을 쌀보다 많이 섞지 않으면 혼났다. 도시락 밥에 보리를 골라 쌀밥 위에 잘 보이도록 심어 놓는 일이 아침의 일과였다. 깜박 잊고 쌀밥을 싸 오면,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인권 침해라고 학생들 일기장 검사도 하지 않고, 소지품 검사도 마찬가지로 하지 않는다. 교복이며 머리 스타일도 학생들이 하고픈 대로 둔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몸과 마음의 속도가 다른데, 어린 시절의 첫 외박 사건은 더딘 내 영혼에 충격을 주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영혼이 따라오길 기다릴 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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