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많은 오역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최근 읽고 있는 <오역하는 말들>을 읽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얼마나 많은 오역을 하고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상당히 많은 관계에서, 많은 말들 속에서 오역을 하고 살았다.
작게는 일상적인 대화부터다.
여자 친구인 S가 일기를 일지라고 부르는 것을 애써 일기라고 정정해 준 적이 있다.
일지는 일에 관한 것, 일기는 자신에 관한 것.
이런 정확한 구분법 아래 있는 언어 사용만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옳은 언어 선택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매끄러운 대화에 필요한 것은 옳은 언어가 아닌 좋은 언어이다.
그렇다면 좋은 언어란 무엇인가?
상대의 맥락을 고려해 이해하기 쉽게 애써 고른 언어가 좋은 언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항상 더 많은 정답을 가진 것도 아니다.
애당초 정답이라는 건 없는 게 인생이니까.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면, 오히려 더 많이 모르고 있다는 낮은 자세로 대화에 임하는 것이 좋다.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지조차 객관적 척도가 없는 일이다.
다만 적어도 그 분야만큼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낮은 자세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언어에 관심이 많아 관련된 책도 읽었고, 독서량 또한 많은 편이라는 주변의 평이 있었다.
그런 내가 자만해서 언어를 마구잡이로 다루게 된다면, 자연스레 오해는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모순된 존재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나는 늘 잘 모른다며 겸손한 척했던 위선자였다.
적어도 언어에 있어서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내가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보면 상대의 맥락을, 그러니까 인생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거창하게 인생을 읽어야 한다고 했지만, 쪼개보면 별 거 없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직업이 뭔지, 혹은 직업이 뭐였는지,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게 뭔지.
이렇게 작은 조각으로 쪼개어 보면 실은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이다.
이렇듯 어려운 일도 작은 일로 잘게 자르면 쉬워진다는 원칙을 여기에도 적용해 볼 수 있겠다.
언어를 사용할 땐, 꼭 맥락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면, 아주 심한 오역은 피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