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세계는 이제 맑습니다.
다만 당신이 내려준 비 덕에 아직은 습합니다.
쨍한 햇빛에 더해진 이 습기는 저를 덥혀옵니다.
꾸덕한 습도와 따뜻한 온도는 당신의 존재이자 부재입니다.
이곳은 아직도 따뜻합니다.
제가 머물다 간 당신의 세계엔 비가 오고 있나요?
당신은 우비를 입었을까요, 아님 우산을 들었을까요?
제 세계에 비가 내린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작은 우산으로 제 몸을 가리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몰아치는 비바람에 저는 홀딱 젖고 말았습니다.
추웠지만, 뼈가 시리도록 추웠지만, 당신이 남겨준 이 비가 고마워 견뎠습니다.
우산을 내려놓고 비를 맛봤습니다.
당신의 품이 이제는 제게 없습니다.
당신에게도 제 품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곳을 지킵니다.
우리만 아는 비밀공간인 이곳을.
당신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을.
언제까지나 석상인 채로 저는 있으렵니다.
그래도 묻습니다.
끝끝내 닿을 수 없어 묻어버릴 물음이래도 묻습니다.
그대도 우산을 내려놓은 채 하늘과 함께 울고 있나요.
그대도 구멍 난 가슴에서 흐르는 눈물을 애써 막고 있나요.
아니면 저를 잊고 살아가고 있으려나요.
애써 헤아리려 해도 헤아릴 수가 없네요.
저 밤하늘 별을 다 못 헤일듯이 말이에요.
이곳엔 저 까만 우주처럼 무엇도 남지 않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