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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잠식시키는 검은 바람

by 궤적소년

조울증을 앓고 있는 내게,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어느 날은 조용히 스며들고, 또 어떤 날은 굉음을 내며 들이닥친다.

나는 그것을 ‘검은 바람’이라 부른다. 검은 바람은 기척도 없이 다가온다.

작은 한숨처럼, 혹은 깃털처럼 가벼운 피로로 시작되지만 곧 나를 완전히 삼켜버린다.


한때는 단순한 무기력으로 여겼지만,

이젠 안다.

그건 신호다.

바람이 몰려오고 있다는 신호. 처음엔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고,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흥미는 바닥나고, 눈앞의 일들이 전부 의미를 잃어갔다.

어제까지 좋았던 일들이 오늘은 짐처럼 느껴졌다.

하루 종일 이불 속에 웅크려 있는 시간이 잦아졌고, 그렇게 나를 감싸던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이 바람은 혼자 오지 않는다. 무기력, 불안, 불면 같은 친구들을 몰고 온다.

무기력은 내 의욕의 바닥을 드러내고, 불안은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끝없이 쏟아낸다.

“왜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걸까.” “지금 이렇게 무너지는 건 나만 그런 걸까.” “앞으로도 괜찮아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할 힘도 남지 않아서 결국 불면으로 이어진다.

밤을 새우는 게 익숙해지고, 새벽 두세 시에 겨우 눈을 감는다.

감았다 해도 얕은 잠, 뒤척이다 다시 깨어나는 나날들.


그렇게 밤과 낮이 뒤섞이고, 내가 나를 잃어가는 느낌이 강해진다.

누군가는 ‘그냥 기분 문제’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울증은 단순한 감정 기복이 아니다.

기분은 겉면일 뿐, 안쪽에서는 일상의 뼈대가 무너지고 있다.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외출조차 벅차다.

한 달 가까이 집 밖을 나서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땐 말 그대로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지켜내려는 의지는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바람의 패턴을 기억하고, 그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약을 거르지 않았고, 일상의 루틴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식사를 챙기고, 상담도 꾸준히 다녔다.

이 작은 습관들이,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크게 지탱해준 건 사람들이다.

의사 선생님은 “기분이 항상 좋기만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예요”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고, 상담사 선생님은 조심스러운 말로 내 속이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셨다.

오랜 친구는 밥 한 끼를 같이 하며 말없이 내 옆에 있어주었고, 쉼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글을 읽고 응원해줬다.

가족, 특히 어머니는 묵묵히 나를 믿어주셨다.

나 혼자였다면 이 검은 바람 속에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바람은 앞으로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휩쓸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 바람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비하는 방법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지키는 법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배우고 있다.

오늘도 바람은 분다.

어쩌면 어제보다 조금 약하게, 혹은 더 조용하게.

나는 오늘도 그 바람을 뚫고 일상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쓰러질 수 있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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