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변곡점 이야기(EP 1)

EP 1. 회사가 없어진다네요

by 츄잉







2024년 10월 중순 쯤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희 팀 중 저보다 경력으로 따졌을 때 약 5년 정도 선배님이시자, 젊은 회계사 중 한 명을 담당하고 계셨던 회계사님이 퇴사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개업을 하러 간다는 소식과 함께요. 회계사로서 한번쯤 생각해보고 목표할만한 아주 좋은 소식으로의 퇴사라 모두들 축하했습니다.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송별회를 따로 가져서 술을 먹는데, 자리 옮기기 전 잠깐 소강 상태일 때 다른 선배님께서 잠깐 말을 꺼내십니다.



"회계사님, 저희 법인 옮긴다는 거 들으셨나요?"



처음 듣는다는 당황한 제 목소리를 넘어 들려오는 대답은 취기를 싹 가시게 만들만한 내용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팀을 옮긴다는 내용입니다. 정확히는 법인을 옮기는게 아니라, 새로운 회계법인을 설립한다는.


선배님도 담배 피러 갔다가 들으셨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담배 피시는 분들끼리는 보통 시간을 같이 맞춰서 나가서 피고 돌아오시는 모습이 일반적인 듯 합니다(속칭 담탐). 그리고 담배 피는 자리에서는 온갖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나온다는군요. 선배님은 흡연자시고, 이사님들과 보통 담배를 같이 피시다보니 거기서 이야기가 나왔나봅니다.


진행중인건지 아니면 결정난 건지를 여쭤보니, 이미 다 정해졌고, 새로 사무실까지 임차해서 바뀐 출근지 지하철 역이름까지 나온 상황이었습니다. 곧 공지 겸 면담있을 것 같다더군요. 이사님들이 자기들이 직접 공지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나 봅니다.









순간 취기가 확 깼습니다. 사실 법인을 옮긴다는 거 자체는 이사님과 선배님들 입장에서는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큰 일입니다. 당시 저는 연차로 따지자면 3년차이지만, 회계감사로 따지면 뉴스탭에 불과하니까요. '등록제 회계법인에서 벗어나서 미등록제 회계법인을 하나 신설한다'는 것은 저한테는 두 가지 문제점이 생깁니다.




우선 첫째는, 저는 회계감사를 사실상 처음(파트는 제외했습니다) 배우는 입장입니다. 그러면 상장사를 감사하면서 업무 경험을 깊게 쌓아야 합니다. Big 4는 비상장회사에 얼마나 리뷰를 퀄리티 있게 주는지 잘 모르겠지만, 로컬의 경우 비상장회사는 Risk가 별로 없어서(이해관계자라고 할 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조서에 대한 리뷰도 별로 없고 심리실도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심리실도 사람입니다. 자기가 리뷰해줘야 할 필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감리의 대상이 되는 상장사한테, 이왕이면 지정감사인 필드에 조금 더 많이 시간을 투입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상장사 감사를 해봐야합니다. 로컬의 경우에는 비상장회사 감사하면 자기 일한거 리뷰해줄 사람이 없어요. 리뷰를 받아봐야 자기가 뭘 놓쳤고, 다음에 어떻게 해야겠다는 피드백이 원활히 가능합니다.



저 역시 이 팀에 들어온 이유 중에 하나가 등록제 회계법인으로써 상장사 감사를 할 수 있다는 환경이기 때문에 들어온겁니다. 로컬에서는 상장사 감사 필드가 없는 팀이 훨씬 많습니다. '등록제 회계법인'이어도 팀에 따라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로컬회계법인은 독립채산제 구조라고 지난 작품에서 말씀드렸었죠. 따라서 Top 10에 속하는 회계법인이더라도 팀에 따라 상장사 감사 필드가 없는 경우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법인 명을 언급해드릴 수는 없지만 면접을 자주 보다보니 체감상 무시할 수 없는 비율이었습니다. 반면 규모가 작은 회계법인이더라도 등록제 회계법인 소속의 팀이면 경우에 따라 상장사를 3~5개 정도 하고 있을 수도 있구요. 진짜 팀바팀입니다. 이제 회계감사의 커리어를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던 상장사 죄다 없어진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인거죠. 제 입장에서는요.



두 번째로, 향후 재취업에 결격사유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행정상 저에 대한 처리는 기존 회계법인 퇴사, 신설 회계법인 입사입니다. 근무조건은 똑같고 사람도 똑같은데 회계법인은 옮겨지는 셈이니 기존회계법인에서는 퇴사, 신설회계법인에 재입사 처리가 되겠죠. 그런데 나중에 이직할때 제 이력서를 놓고 보면 'Big 4에서 수습만하고 등록제 로컬로 빠져나왔다가, 등록제 로컬에 입사한지 4개월 만에 퇴사하고 신설 회계법인(미등록)에 입사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요즘 같이 업황이 안 좋을때는 회계법인의 힘이 훨씬 강합니다. 요새 면접 공고 하나 열리면 이력서가 40개 넘게 쏟아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면접을 봤던 회계법인(로컬) 팀들도 과거와는 너무 분위기가 달라 당황스러워 하셨습니다. 사실 서류전형이랄것도 없는데, 40명 가까이 되는 인원에서 면접대상자 5~8명을 추리고, 그 중에서 1~2명을 합격 시키는 셈이죠. 경력직 시장이 이렇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진 셈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가장 간편하게 서류 필터링을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로컬회계법인에서 근무한 경력이 1년이 안되는데 법인을 옮긴 이력이 있는 사람'의 이력서를 파쇄기에 넣는 행위라고 합니다.(이건 파트했을때(2021년)의 파트너님과, 전 직장 파트너님(2024년)의 공통적인 증언입니다. 물론 이게 회계기준도 아니고 모든 법인이 이런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닙니다)그러니까 조직 부적응자로 간주하는 것이죠. 회사 입장에서는 짧은 기간내에 메뚜기마냥 이직을 하는 사람을 좋게 볼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신설회계법인으로 따라간다고 가정해봅시다. 우선 시즌은 보내고, 그리고 4월부터 이직을 준비하겠죠? 근데 이력서를 넣으니 당연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얘 편한거 좋아하네, 그냥 놀고 먹고 돈 받고 싶어하네. 아무리 요즘 애들이 MZ니 어떻다지만 얘는 뭔 박쥐인가? 입사한지 1년도 안되었는데 시즌 끝나자마자 홀라당 퇴사한거면 문제 있는거 아냐?' 이렇게 보일 겁니다.


그걸 소명을 할려면 2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면접관이 Reference Check를 하거나, 아니면 저를 면접장에 불러서 자초지종을 듣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업황이 안 좋고 일하고 싶어하는 회계사가 넘처나는 세상에서 왜 그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려 하겠습니까? 그 이력서 말고 수십개 의 이력서가 지금 도착해 있는데요. 심지어 저는 황금 커리어가 아니라 커리어가 꼬인 케이스입니다. 저 같아도 다른 지원자 검토하고 있을겁니다.


문제는 회계업계의 불황이 해결될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과(경기가 회복되어야 회계업계도 좋아집니다. 회계사도 경기를 타는 직업입니다(특히 딜), 로컬 같은 경우 서류에서 필터링 당할 너무나도 좋은 명분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서 이직할 때마다 제 발목을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계사로서 3~4년차는 정말 정말 중요한 연차입니다. 이거 때문에 내년에도 발목잡히면 저는 3~4년차의 연차를 그대로 날려버리게 되는 것이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타입이다보니, 사실 2차 술자리에서부터는 집중이 잘 안됐습니다. 리액션은 충분히 하는데 마음이 다른데 가있는 느낌. 상장회사를 할 수 있는 다른 팀으로 옮기는게 맞기는 한데, 당장 무직 백수가 되기에는 업황이 너무나도 안 좋았습니다. 시즌 얼마 전 부터 떠있는 공고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 공고는 대부분 바로 인차지를 시킬 수 있는 즉시 전력감을 원합니다. 공고에 그렇게 적어 놓습니다. 그렇다고 여기 있다가 내년에 나가는것도 뭔가 좀 그렇고요.


이후 술자리가 끝나고 집 방향이 같은 회계사님과 이래저래 말씀을 나누며 걸었습니다. 저한테 슬쩍 법인 옮긴다는 이야기를 미리 해주신 분입니다. 이 회계사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드리는 분인지라 이후의 에피소드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일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생각해주시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애써주신 분입니다. 직장생활 하다보면 사실 다른 사람한테 그러기 쉽지 않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정말 귀한 분이시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더 샀습니다. 회식 때도 적게 마신건 아닌데 집에 오는 과정에서 자꾸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배가 불러서 특별히 안주랄건 없고 그냥 생수 한컵 떠다놓고 소주 한잔 먹고 물마시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먹으면 먹을수록 정신이 또렷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2024년에 진짜 뭔가 마가꼈나, 진짜 인생 더럽게 꼬인다 등 별의 별 생각을 했죠. 유난히 잠 드는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작가의 이전글어느 변곡점 이야기(EP.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