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변곡점 이야기(EP 2)

EP 2. "이게 동의요? 통보지"

by 츄잉




이번 에피소드를 설명드리기전에 영화 한 장면을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신세계(2013) 영화 좋아하시나요? 개인적으로 이런 느와르물 좋아해서 엄청 재밌게 봤었습니다.

신세계 영화를 보면 아래와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강형철 본청 과장(최민식 分)이 '골드문' 조직의 실세 정청(황정민 分)을 경찰서로 데려가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경찰청 수사 기획과에서 자기한테 뭔 볼일이냐는 질문에 강형철 과장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즈니스 적으로다가 이야기를 나눌려고 한다며 파일 하나를 손으로 정청 앞까지 밀어놓습니다. '골드문 비리 수사 보고서'라는 보고서 파일이죠. 보고서에는 이중구(박성웅 分)에 대한 비리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이간질하려는 의도를 눈치챈 정청은 자기가 그런 더러운짓까지 할 것 같냐는 말로 단칼에 거절하죠.


과장은 들은 체도 안하고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라며 또 하나의 자료를 내밉니다. 영화 상에서 자세히 표현되지는 않지만 정청 쪽 내부 사정이 담긴 자료인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정청의 내부자가 직접 경찰에 제보한 것이 아니면 경찰에서 들고 있을 수가 없는 자료죠. 정청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그렇게 솎아낸다고 솎아냈는데 프락치들이 남았던거냐고 합니다. 그리고 이걸 왜 자기한테 보여주냐며, 이 정도로 잘 알고 있으면 본인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때 강형철 과장이 하는 말이


강형철 과장 曰 "그래도 수술 들어가기 전에 보호자 동의는 있어야지"


(출처: 영화 신세계(2013))


정청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저 표정에 아주 잘 드러나있죠


정청 曰 "이게 동의요? 통보지"







회식 끝나고 그 다음날입니다. 오후 2시쯤 갑자기 대장 이사님(파트너 분들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실제 업무 수행이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 이사님)이 방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시더군요. 순간 그 면담이라는걸 하는건가 싶었습니다. 저한테 말씀 해주셨던 A 회계사님도 적당히 처음 듣는척 하고 잘 갔다오라고 말해주십니다. 약간 긴장하고 들어갔습니다.



"어어, 앉아. 아 다른게 아니고, 우리가 법인을 옮기게 됐어. 새로 OOO역 근처에 있는 곳으로 팀 전체가 다 옮기게 되어가지고, 그거 말해줄려고. 12월 초순에 옮길 예정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같이 옮길거야. 근데 팀 전체까 한날 한시에 다 갈 수 없으니까 몇명은 선발대로 12월 초순에 가고, 나머지는 12월 말이나되어서 합류하는걸로 할까해. 너는 제일 먼저 가는 그룹이 될거야. 11월 11일 부로 퇴사처리될거고, 퇴사처리하고 입사처리 새로 밟으면 돼. 근로조건은 모두 동일하게 계약서 다시 작성할거야. 그거 말해줄려고"




처음에 장황하게 영화 이야기를 왜 했냐면 그때 머릿속에서 신세계의 저 장면이 재생이 되고 있었거든요. '이게 동의요? 통보지'라는 대사는 제 속마음과 100% 일치했습니다. 제 버전으로 바꾸면 이게 면담이요? 통보지. 이 정도가 되겠네요. 물론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삼켰습니다. 저는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구성원들한테 미리 이야기해주는게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없어진다는 건 시간을 충분히 두고 이야기 해주잖아요? 근데 무슨 점심 메뉴 고르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답니까.



궁금한거 없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있죠. 질문이 한 두개가 아닙니다. 여러 질문을 했는데 크게 3가지 했습니다. 첫째, 지금 하고 있는 상장사 감사 업무는 어떻게 되냐, 당장 시즌은 뛰어야 하지 않냐. 둘째, 왜 제가 가장 먼저 퇴사하고 입사하는 대상이냐, 셋째, 여기서 상장사 업무를 배우며 시즌을 뛰고 시즌이 끝나고 차라리 거기 합류하는 조건으로 바꿀수는 없느냐 입니다.



궁금한거 없냐는 질문은 의례적이었던 것인지 궁금한걸 조곤조곤 다 물어보니 좀 당황하시더군요. 그리고 일단, 제 표정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표정관리가 안 되기도 했고 너무 의가 상해서 솔직히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화가난 건 미리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는 것. 법인 옮기는게 무슨 동네 쇼핑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하루 이틀 전에 이야기 나온건 아닐 것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7월 입사했는데 12월초에 옮겨야할 정도면 그 이전에도 진행되고 있었다는 소리잖아요. 이야기 해줄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약간 이새X 뭐지 하는 표정으로 보인다'며 분위기 풀어보려고 나름 말씀하신거 같은데 한 마디도 안했습니다. 그렇게 쳐다본거 맞거든요.


제가 말씀드린 사항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논의해보겠다고 합니다. 1시간 30분쯤 뒤에 한번 더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선택지 3개 주시더군요.


선택지 1. 시즌 뛰게 해줄테니, 시즌 끝나자마자 바로 나가서 다른 직장 찾을 것

선택지 2. 지금 나가서 구직활동 다시할 것

선택지 3. 신설 법인으로 따라올 것



우선 선택지 2는 처음에는 아예 제꼈습니다. 나가면 백수될 판입니다. 안될 말이죠. 선택지 1도 고민은 했는데, 결국 배제했습니다. 이전 EP1에서 언급드렸던 문제점 중 2번째 이유(박쥐처럼 보일까봐)와 같은 판단에서였습니다. 결국 선택지 3으로 결정했습니다. 딱히 고민한다고 안빼고 그냥 그 자리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따라가겠다구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5월 극초반까지 결국 직장 못 구하고 백수생활을 했는데 선택지 1이 결과론적으로는 나았으려나 싶네요. 물론 당시에는 만약 나가면 무조건 시즌 직전에 새 팀 구한다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그날부터 팀에 대한 마음도, 회사에 대한 마음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뒤부터는 회사 다니면서 거의 말을 안했습니다. 점심 먹을 때 그냥 맛있게 드세요, 다 먹고 잘 먹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안녕하세요. 이 정도. 일단 말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건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화도 났고 삐진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제 인생에 대한 걱정으로 일이 손에 하나도 안잡혔습니다. 저한테 시키시는 일이야 어려운게 없고, 어쩄든 파트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거리니 충분히 할 수 있고 하고 있는데, 눈과 손은 노트북을 보고 있는데 영혼은 거기 없는 느낌.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선택지 3이라고 해놓고 왜 팀을 나오게 됬냐고 물어보실 수 있는데, 선택지 3에서 선택지 2로 바뀌게 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한 1주일에서 열흘 정도 지났을 때, 다른 이사님이 커피를 한잔 마시자고 불러내셨거든요. 그 대화와 날을 기점으로 제가 내린 선택지가 '따라간다' 에서 '따라가지 않는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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