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남재 May 28. 2020

아름다운 곳, 더 아름다운 사람

여행이 삶에 미친 나비효과 Pt. 9

아침 식사

숙소 근처에 아침마다 가는 식당이 있다. 오픈 시간에 맞춰 매일매일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다 보니 어느덧 단골이 되어버렸다. 내 좋아하지도 않는 메뉴가 단지 싸다는 이유로 이 식당의 단골이 되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튼지 간에 종업원들은 그런 나를 알아보고 “Welcome.”이라며 반갑게 맞아준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이라곤 나밖에 없어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대화를 나누는데 이 친구들 전부 네팔에서 왔다고 한다. 인도에 왜 네팔사람들이 팀을 이루어 일하고 있냐고 물어보니 월급이 더 세서 돈 모으러 왔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주나 캐나다같이 시급이 더 높은 나라에서 일하듯 네팔사람들은 가깝고 시급이 좀 더 높은 인도로 많이 온단다.


“그러면 인도보다 시급이 훨씬 좋은 나라들도 있잖아.”

“맞아. 근데 비자 받기가 어려워. 그리고 돈 없으면 못가.”

“응? 돈 벌러 가는데 돈이 있어야 해?”

“통장에 돈이 없으면 아예 비자 발급이 안 돼.”     


잔액이 얼마 있는가를 검사하는 것은 불법 체류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인도보다 시급도 세고 근로환경도 좋은 한국으로 일하러 가길 원하지만 비자 발급조건도 매우 까다로운 데다 한국어 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비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공장에서 일할 때 만났던 외국인들의 한국어는 수준급이었다. 그 정도 수준으로 오르려면 오랜 시간 노력을 쏟아부었을 테니 이 친구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소위 ‘헬조선’이라 부르는 우리나라를 그 힘든 과정을 거치더라도 오고 싶어 한다는게 솔직히 좀 충격적이다. 늘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헬조선에서 참 살기 힘들다고 말해왔는데 정말 어린애 투정에 불과했다.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 친구들과 달리 난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나는 덩치만 커졌지 아직 애나 다름없다.

     

오늘은 그렇게도 풍광이 빼어나다는 바쉬싯에 가보려 한다. 몸이 좀 지쳐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려 했는데 숙소주인이 하도 닦달하다시피 칭찬을 한다. ‘그래. 얼마나 멋진지 한번 보자.’라는 생각에 속는 셈 치고 길을 나선다. 참 특이하게도 바로 옆 마을인데 실제로 가는 데는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올드 마날리에서 강을 통하는 다리만 있다면 20분 정도만 걸어도 될 거리를 삥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바쉬싯으로 가는 길은 위험천만하다. 보행자 도로는 당연히 없고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버스와 오토바이가 쌩쌩 달리는 도로 위를 5km는 걸어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 도착한 당일 비 오는 새벽에 배낭을 메고 어둠 속을 걸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듯하다. 사고가 날까 노심초사하며 한쪽에 착 붙어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저 멀리 하얀 설산이 보인다.      


인터넷에 마날리에 관해 찾아보면 항상 나오는 설산 사진이 있다.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늘 궁금했는데 그곳이 이 위험천만한 도로 위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산 위에 백설기를 얹어놓은 듯 햇빛에 반사된 새하얀 눈을 보니 며칠 후 밟게 될 히말라야가 더욱 기대된다.     


바쉬싯은 온천과 폭포로도 유명한 곳이다. 시간관계상 둘 다 가보기는 무리가 있어 한 곳만을 선택해야 한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온천은 솔직히 위생에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 바닥 곳곳에 소똥이 있는 이 마을의 온천이 더러울 것이라 단정 지어도 죄책감은 들진 않는다. 마을 너머 산자락을 넘어가야 있는 폭포까지도 꽤 먼데 숙소까지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 하루 최소 16km는 걸어야 하는 셈이다. 다리에 쥐만 안 나면 다행이다. 

    

동네 사우나 냉탕에 설치된 폭포샤워기가 알몸을 때릴 때의 찰진 소리가 들려온다. 찰싹찰싹 아주 시원하게 쏟아진다. 넘실대는 웅덩이에 발을 담그니 이 뜨거운 날에도 물은 얼음장같이 차갑다. 물속에 뛰어들었다가는 심장마비가 올 듯해 깔끔하게 포기하고 대신 웅덩이 한가운데 있는 돌 위에 누워 멍이나 때린다. 듣기만 해도 시원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기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맥그로드 간즈의 큰 절에서 명상할 때도 느꼈지만 ‘눈을 감고 잠깐 생각하기’는 내가 무엇을 해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리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함은 행동이 아닌 습관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좋은 것을 깨달았다면 그 행위를 꾸준히 이어가야만 내 것이 된다는 의미다. 한국에서 다시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더라도 아침에 딱 5분간 눈을 감고 집중하는 시간을 통해 머리를 맑게 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아이들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돌아가는 길, 올 때는 지쳐서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던 것들이 새로이 보인다. 바쉬싯도 시멘트 건물이 쭉 늘어서 있는 올드 마날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는데 이는 확실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올드 마날리는 관광지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게스트하우스가 주를 이루는데 이곳은 상업화가 되지 않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물이 졸졸 흐르는 곳에서 엄마들은 빨래하고 있고 그 옆에서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놀고 있는 이곳은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 온다.


“포토? 포토?”

“오케이. 오케이.”


조심스레 사진을 찍다가 아이들이 수줍어하는 것 같아 카메라를 내리니 얼른 찍으라며 아예 하던 빨래를 멈추고 아이들 자세를 잡아준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이와 어머니의 조합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티 없이 맑을 수가 있을까.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도 전혀 없는 호의적인 태도에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곳까지 오기 힘들긴 해도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참 좋다.        

음머어~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는 누가 인도 아니랄까 반대편에서 할머니가 소를 끌고 오고 있다. 폭이 좁은 외길이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숲으로 재빨리 들어가 길을 비키니, 그런 나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하신다. 이 동네 사람들은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한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 전형적인 관광지인 올드 마날리에서는 느끼기 힘든 따뜻함이 있는 곳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날 조금 더 고생해서 바쉬싯에 숙소를 잡을 걸 그랬다.     

작가의 이전글 물에 빠진 생쥐, 그래도 돈은 아껴야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