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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남재 May 15. 2020

아름다운 밤, 잠 못 드는 밤

여행이 삶에 일으킨 나비효과 Pt. 3

황금 사원은 호수를 따라 난 대리석 길의 끝에 있다. 누구나 이 길을 따라 그 내부로 들어갈 순 있지만, 종교적 성소인 만큼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머리를 가리고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어야 하며 맨발로 다녀야 한다. 입구에서 빌린 두건은 냄새가 진동하고 발은 금방 새까매졌어도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좋다.


치유 효과가 있다는 호수에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몸을 담그고 있다. 물속의 누구도 하얀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것쯤은 괘념치 않는 듯하다. 나도 발이나 담가 볼까 해보지만 역시 그만두고 황금 사원으로 향한다. 이 더러운 발을 신성한 물에 담글 순 없잖아? 이미 사원으로 가는 다리에는 순례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건 어떤 의미이길래 이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걸까? 난 종교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모여있는 모두 들뜬 목소리로 떠들며 차례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매우 설레는 일임은 분명하다.

   

사원 내부는 1층과 2층으로 되어있다. 1층에는 성직자들이 경을 외고 있고 신나게 떠들던 순례자들도 약속이나 한 듯 조용히 기도드리는데 그 모습이 사뭇 엄숙하다. 2층은 오직 순례자만이 명상하는 곳으로 난 누가 봐도 시크교도가 아니기에 아쉽지만 갈 수가 없다. 성직자들의 등에 대고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경의를 표한 뒤 조용히 빠져나온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다시 황금 사원으로 간다. 황금빛 조명이 나오는 밤의 황금 사원이라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기 직전 기대에 부풀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아직 개봉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근사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찬 기대감. 달빛에 물든 사원의 모습을 멋대로 상상하며 밤거리를 나선다. 분명히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우리라.

입구에서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드디어 밤의 황금 사원을 마주한다. 

“와...”

딱 한 마디, 그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언어 기능이 퇴화가 될 만큼 비현실적인 모습에 계속해서 짧은 감탄사만을 내뱉을 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사원은 신성할 정도로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자기 이외에는 무엇도 신경도 쓰지 말라는 듯 우리의 시선을 쫙 빨아드린다. 마치 황금색으로 빛나는 블랙홀처럼 말이다. 작년에 보았던 타지마할은 수학적으로 인간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비율로 만들어진 대칭성 그리고 세세한 보석들이 돋보이는 섬세함이 감동을 주었다면, 황금 사원은 뿜어져 나오는 아오라 하나만으로 모두를 사로잡는다.


“와. 이런 곳에서 공짜로 묵을 수 있다니. 진짜 행운이다. 그치?”


“그러니까. 우리 헌금이라도 해야겠는데? 봉사활동도 더 해야겠다.”


새벽에 몸이 하도 가려워서 침낭에 빛을 비추어 보니 무언가가 잔뜩 기어 다니고 있다. 핸드폰 플래시에 놀란 벌레 새끼들이 후다닥 숨는다. 진드기란 것들은 참으로 성가시다. 이것들이 문 부위는 모기에게 물릴 때보다 훨씬 가려우며 긁기라도 하면 피딱지가 내려앉는다. 그걸 다 떠나서 잠든 내 몸을 기어 다닌다는 생각에 잠을 청할 수가 없다. 잘못해서 내 귓구멍에 들어가면 어떡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침대에 있으면 또 몸으로 오를까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들을 이어서 그 위에서 잠을 청해봐도 역시 잠을 잘 순 없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자는 둥 마는 둥 몽롱한 상태로 있다가 어차피 잠 못 드는 밤, 일출이나 봐야지 싶어 어기적거리며 황금 사원으로 간다.


새벽 4시밖에 되지 않은 이른 시간임에도 기도를 드리려는 순례자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역시 인도답다고 해야 할까. 황금 사원 근처는 바닥에 쫙 누워있는 사람들로 빈틈없이 가득하다. 장판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꿉꿉한 냄새 때문에 그 위에 일렬로 누워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흡사 해안가의 햇빛에 건조되는 명태 같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이런 문화유산에서 잠을 청했다가는 당장 경비아저씨가 쫓겨낼 텐데 여긴 노숙이 당연한 상식으로 통한다.


시간이 지나 노오란 해가 떠오르며 광채를 잃었던 황금 사원이 다시 밝아 오른다. 세상 어디에서도 없는 특별한 장소 그리고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려 하지만 왜인지 담기질 않는다.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비싼 카메라를 가진 사진작가들은 이 느낌을 잘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밤 자기 전에 사진을 정리하고 일기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으로 표현할 실력이 안 된다면 비록 좋은 글솜씨는 아닐지라도, 후에 그 글을 내가 찍은 미숙한 사진과 같이 보면 그 느낌이 다시금 살아나기 때문이다. 있었던 일과 당시 느낌을 기록한다는 건 시간의 흐름 앞에 희미해지는 발자취를 가슴에 새기는 행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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