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먹었던 끔찍한 모모 때문인지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아침부터 속이 쓰리다. 술도 안 마셨건만 왠지 얼큰하고 뜨뜻한 국밥이 땅긴다. ‘뚝배기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돼지국밥에 다진 양념을 풀고 한 숟갈 하면...’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비록 국밥은 없지만 그나마 비슷한 태국의 전통음식 뚝바를 주문한다. 고명으로 두부와 몽실몽실한 계란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싱싱한 채소가 올려져 있는 현지에서도 본 적 없는 푸짐함이 담겨있다. 보기만 해도 몸보신 제대로 되는 이 진국은 맛도 제대로다. 흡족한 얼굴로 배를 두들기며 숙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바그수’와 ‘다람코타’라는 마을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맥그로드 간즈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5km 떨어진 작은 마을 바그수와 다람코타가 있다. 숙소 주인에 따르면 바그수는 큰 폭포가 유명하고 다람코타는 예쁜 벽화가 돋보이는 마을이라고 한다. 어디가 더 좋은지 몰라서 그냥 둘 다 가보려 한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곳이지만 남는 게 시간인데 가만히 있어봤자 지루하기만 하다.
5km를 걸어서 도착한 바그수는 정말 별것 없다. 오히려 맥그로드 간즈보다 작은데 차와 릭샤가 많아 혼잡하고 지저분하다. 그래도 폭포 때문에 추천받은 곳이니 뭐가 있어도 있겠지 싶어 마을을 벗어나니 멋진 산책로가 나온다. 마추픽추를 손톱만큼 떼어온 듯한 산 중턱의 회색빛 돌담, 그 위에서 귀여운 뿔을 가진 염소가 뛰노는 모습에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것 같다.
마추픽추 손톱
길의 끝에는 꽤 큰 폭포가 있는데 물이 정말 차갑다. 무협지에 보면 폭포 아래서 멋있게 수련하고 그러던데 역시 무리다. 그냥 폭포 옆 바위에 앉아 물 떨어지는 소리나 들으련다.
하지만 옛말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얼마 앉아 있지도 않았는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웬 날벼락인가 싶어 얼른 바그수로 뛰어간다. 숙소까지 5km나 되는 거리를 비를 맞으며 걸을 수는 없어 처마 밑에서 비가 좀 줄어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은 걸까?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처마 밑에 처량하게 서 있으니 대뜸 없이 걱정이 앞선다. ‘취업은 어떻게 하지?’,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예전부터 끝없이 고민하던 문제가 다시금 떠오른다. 생각만 하던 1년 전과는 달리 답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주체가 안 되게 머릿속을 휘젓는 고민의 소용돌이가 심히 당황스럽다. 머나먼 타지에서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잡생각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다.
쓸데없는 걱정을 떨쳐내려 머리를 휘휘 저으며 다람코타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행히 빗방울은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제 구름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또 5km를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 이때, 웬 멋쟁이 인도 친구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걸어온다.
“이봐 친구 어디가?”
“다람코타 가는 중이야!”
“그래? 나도 거기 가는데 태워다 줄게.”
“오오! 정말 고마워.”
이미 왕복 10km를 걸어 다리가 피로했던 차라 사양하지 않고 올라탄다. 맥그로드 간즈의 날개 없는 천사 친구 덕에 최소 1시간은 걸을 거리를 눈 깜짝할 새 왔다. 마을에 도착해서 날 내려주더니 잘 가라며 인사하고는 요란한 소리만 남겨두고 휙 가버린다. 멋짐이 폭발하는 친구와 사진이라도 한 컷 같이 찍고 싶었는데 틈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 흔한 릭샤도 없고 마을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새소리뿐이라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숙소 주인의 말과 다르게 벽화는 없고 알록달록한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다. 그래도 예쁘다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알록달록 집들도 예쁘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요가센터와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예전부터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이런 적막한 동네라면 나의 형편없는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으리라. 시간만 허락한다면 이 동네로 숙소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히말라야로 얼른 떠나야 하기에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규모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을에 대마초를 피는 히피들 말고는 관광객도 보이지 않는다. 워낙 외지에 있어서 보는 눈도 없고 단속도 없으니 약쟁이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내가 약을 해본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약을 한 사람들을 인도에서 많이 봐왔는데 눈이 풀린 채로 혀를 내밀고 바닥에서 구르게 만드는 담배 종류는 역시 대마초밖에 없다. 내가 섣불리 판단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라면 이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공기 좋은 곳까지 와서 대마초에 찌들고 싶을까.
다람코타를 둘러본 후에는 마을로 돌아와 다시 큰 절로 간다. 절에 가는 횟수만 보면 불심 가득한 신도로 보이겠지만 내가 독실한 불자라서 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차분한 분위기가 좋고 스님들의 얼굴에 평온함이 깃든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한결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2층에 서양인 어린애가 진지하게 절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장면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여태 보았던 방문자들 대부분은 슬프게도 스님들의 수행을 그저 구경거리로만 여기는 듯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수행하긴커녕 명상하는 스님 얼굴에 허락도 없이 카메라부터 들이밀고 본다. 그와 대조되게 불교와는 딱히 관계가 없을 문화권에서 자라온 어린 친구가 수행에 임하는 모습을 보니 매우 인상 깊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어른들보다도 말도 한마디 섞지 않은 이 친구가 어린아이임에도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3살짜리 어린애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이 딱 이 순간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문화를 대할 때 저렇게 진지하게 대하는 저 자세는 모두가 배워야 할 미덕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