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감독 데뷔 못한 게 한국영화 불황이랑 뭔 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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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시나리오 캐릭터 연구 겸 취재 차 실제 범행을 저질렀다는 말은 왜 했을까? 영화감독이 영화를 잘 만들어보려고 한 짓이니 정상 참작이라도 될 줄 알았나? 그냥 무직이라고 하고 돈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면 ‘대낮 가정집 노린 절도범, 잡고 보니 영화감독’이라는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없었을텐데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내가 다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둑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의 시나리오 집필을 위한 취재 차 실제 절도 행각을 벌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돈이 없어서였겠지. 마지막 작품이 개봉한 지 10년 가까이 됐고 미혼이라 셔터맨도 못하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니 돈 나올 구멍이 없으므로 빚만 산더미였을 것이다. 안 봐도 훤하다.


영화로 유명해진 게 아니라 안타깝지만 이현철 감독은 이미 네임드였다. 체포 기사가 이미 각종 SNS와 영화 커뮤니티 등에서 소소한 화제 몰이 중이었고 도둑 감독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제 이현철 감독은 죽을 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독립영화 같은 것도 무리다. 본의 아니게 도둑 감독으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영진위 제작비 지원사업 등에 선정될 가능성은 제로고 생활고 때문에 도둑질 까지 하는 마당에 최소 수천만원에 달하는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돈 못 버는 남편을 십여년째 먹여살리고 있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유정아 고맙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서 번 돈으로 나의 감독 활동을 후원해주는 유정이 없었다면 나도 이현철 감독처럼 됐을 지도 모른다. 전작의 흥행성적이 이현철 감독보다 못하므로 지금보다 더 비참했겠지. 그래도 나는 소심해서 대낮에 가정집 절도는 꿈도 못 꿨을 것 같고 그냥 영화감독의 꿈을 버리지 않았을까?


그러고보니 라이벌이 한 명 줄어든 셈인가? 이현철 감독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밀리언 필름 같은 영세 신생 중소 제작사 입장에서는 감독 섭외가 쉽지 않다. 이런 회사를 상대해주는 감독은 경험이 없는 지망생급 신인이거나 한 때 잘 나갈 뻔하다 주저 앉은 퇴출 직전 감독이 대부분이라 이현철 감독이나 나같은 잘 나가지는 않지만 퇴출까지는 아닌 기성 감독에 대한 수요가 종종 있어왔는데 요즘 영화계가 워낙에 불황이라 얼마 안 되던 수요마저 줄어드는 추세이다보니 피치 못한 경쟁이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한 일이 참 많다. 유정은 물론이고 구창한 작가도 고맙다. 만약 그 때 임 감독의 장례식장에서 구 작가와 재회하지 않았다면 ‘가족사냥’ 모니터를 부탁받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번듯한 사무실에서 감독 대접은 커녕 아직도 방구석에서 눈치밥 먹으며 새로 나온 시나리오 작법책이나 뒤적이며 혼자 시나리오 쓰겠다고 낑낑 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시나리오 공모전이나 영진위 지원사업 같은 곳을 기웃거리다 로또 사는 심정으로 예전에 써 둔 시나리오를 응모했다가 떨어지고 17년째 감독 지망생 심동민이랑 심사위원 뒷담화나 깠겠지. 공모전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었다는 부질없는 각오를 다지며.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겠다. 그래도 올해 신춘문예까지는 내 볼까? ‘버진 어게인’이 있잖아? 밑져야 본전이고 되면 땡큐다. 비록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 박미나에게 혹평과 함께 매몰차게 까였고 상금도 300만원 밖에 안 되지만 수상 경력이 있으면 폭망 감독 이미지 세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다. ‘가족사냥’에 집중하자. 자꾸 이렇게 프로젝트에 집중 안 하고 한 눈을 파니까 안 되는 거야. 그래도 밑져야 본전인데.. 망설이고 있는데 스마트폰 진동 음이 울렸다.


유정이다. 이 시간에 전화한 적이 없는데 웬일이지? 평소 같으면 받았겠지만 지금 전화를 받았다간 바로 앞에 있는 석 팀장에게 유정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받을 수가 없었다. 한 때 뜨거운 사이였고 얼마 전에도 잠깐이지만 뜨거운 밤을 보냈던 사이인 석 팀장에게 태연하게 아내의 목소리를 들려줄 정도의 강 심장은 못 된다.


“전화 받아. 나도 잠깐 통화 좀.”


내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자 석 팀장도 자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방을 나갔고 문이 닫히자마자 유정의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 왜?”

“야!”

“야? 야가 뭐야? 남편한테!”

“솔직히 말해.”

“뭘?”

“너 바람 피우니?”


어떻게 알았지? 순간 혜나와 석 팀장의 얼굴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니지만 안 피웠다고 볼 수도 없기에 너무 놀라서 아무 말 못하고 있자 유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혜나와의 관계를 들킨 걸까? 아니면 석 팀장? 설마 둘 다?


혜나가 유정을 찾아가서 그 날 밤 대학로 모텔에서 있었던 일을 고자질했거나 아니면 별 생각 없이 누군가에게 폭망 감독 새끼한테 차기작 캐스팅 희망고문 끝에 먹튀당했다고 하소연했는데 그게 흘러 흘러 유정의 귀에까지 들어간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비록 30대 중반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여배우가 중년에 유부남이기까지 한 폭망 감독과 대학로 모텔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떠들고 다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얼굴이 왜 그래? 별 일 아니지?”


멍하니 전화기를 들고 있는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석 팀장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안 그래도 절도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이현철 감독 때문에 밀리언 필름에 불똥이 튈까봐 머리가 복잡할 텐데 밀리언 필름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나까지 사고를 칠까봐 걱정이 된 것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우리 사이 누구한테 말한 적 있어?”

“우리 사이가 뭔데? 감독이랑 피디 사이?”


역시 석 팀장은 아니다. 애초에 철두철미한 성격이고 둘만 있을 때조차 그 날 오피스텔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데 남에게 말 했을 리가 없다. 석 팀장은 우리 사이에 언제 원나잇 같은 게 있었냐는듯 태연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고 실제로도 석 팀장의 머릿속에선 그 날 일은 완전히 삭제된 듯 했다. 석 팀장이 유정에게 제보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지금 나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간 나와 한 배를 탄 석 팀장에게도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정이 뭔가를 알고 있다면 석 팀장과의 원나잇은 아닌 것 같고 혜나와의 관계일 것이다. 나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나와 혜나와의 관계에서 뭔가 수상함을 느끼고 유정에게 제보한 것이다. 정확한 사실은 몰라도 어쩐지 그렇고 그런 관계 같다고 제보만 해도 나를 의심하기엔 충분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런 제보를 했을 만한 용의자는 딱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구창한 작가.


구 작가가 아니라면 나와 혜나의 관계를 질투한 심동민일 수도 있지만 동민은 그런 짓을 저지를 만큼 표독스럽지 못하다. 아무리 감독 데뷔에 성공했고 차기작 연출 직전인 내가 부럽고 질투가 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20년 된 친구 사이다. 친구끼리는 그런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진 않는 법이다. 무엇보다 동민은 혜나를 사랑한다. 본인이 연출 예정인 단편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해서 영화를 찍다가 잘 하면 결혼까지 갈 수도 있는데 미래의 아내를 유부남 겸 폭망 감독과의 불륜 사건으로 엮고 싶진 않을 것이다.


역시 구창한 작가 뿐이다. 내 주변엔 창한 말고는 그런 짓을 할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석 팀장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스마트폰만 계속 들여다보고 문자를 주고 받다가 암튼 이현철 감독을 손절하라고 몇 번을 더 신신당부하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석 팀장이 나가자마자 다시 유정에게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지 통화가 안 되자 별 생각이 다 들어서 싱숭생숭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데 동민에게 카톡이 왔다. 한국영화 불황이 길어져 내년엔 개봉할 창고영화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뉴스 링크였다. 한국영화가 어려운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가뜩이나 싱숭생숭한데 이딴 걸 왜 보냈냐고 답톡을 보내자 바로 전화가 왔다.


“왜?”

“고민이 좀 되네.”

“뭐가?”


동민은 한국영화가 이렇게 불황이고 어려운데 단편영화 잘 만들어봤자 과연 장편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며 혜나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영화 제작 의욕이 사라졌다고 징징댔다. 주변에 아는 배우들도 다 일이 없어서 놀고 있고 ‘우리’보다 잘 나가는 감독들이 준비하는 작품들도 대부분 엎어졌다고 하고 영화과 후배지만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나가는 감독인 태준이가 준비한다던 프로젝트도 엎어질 위기라는 소문을 들었다며 단편영화고 뭐고 차라리 넷플릭스용 드라마 대본이나 써야겠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평소 같으면 바쁘다고 끊었겠지만 ‘우리’에서 긁혀버렸다. ‘우리’보다 잘 나가는 영화과 후배 태준이 작품이 엎어질 위기라는 소문 얘기엔 살짝 위로가 됐지만 엄연히 극장 개봉 경력 감독인 최경진과 17년째 감독 데뷔 준비 중인 심동민이 어떻게 ‘우리’란 말인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감독 데뷔 못하는 거랑 한국영화 불황이랑 뭔 상관이야? 한국영화가 1년에 수백편씩 만들어지던 호시절에도 데뷔를 못 했으면서 불황 핑계를 대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는 쉬워 보이냐? 영화판 어려워서 드라마로 간 시나리오 작가들 중에서 데뷔한 경우가 몇이나 되는 지 알아? 어찌어찌 데뷔는 했더라도 다음 작품까지 편성이 성사된 작가는 더 극소수야. 넷플릭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니까 평생 감독 지망생으로 살다가 끝나고 싶지 않으면 50살 되기 전에 단편영화라도 만들어. 그러면 적어도 혜나씨에겐 감독님 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 그리고 너랑 나는 다르지. 우리가 어떻게 ‘우리’냐? 극장 개봉 경력 감독이랑 17년째 감독 지망생이 같아? 나야 한국영화가 불황이어서 차기작 메이드에 어려움을 겪은 건 사실이지만 너는 손해 본 거 없잖아? 나처럼 감독 계약하고 준비하다가 엎어지기라도 했어? 감독 제안 비슷한 거라도 받은 적 있어?”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