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칸느 영화제 진출해서 10여분 간 기립박수

092.

by Zinn


17년째 감독 지망생 심동민은 왠일로 내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혜나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너무 뼈를 때렸나? 그래 네 말이 맞다. 한국영화는 불황이니까 차라리 넷플릭스를 노리라고 대충 맞장구 쳐주고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찝찝하던 중 석 팀장에게 카톡이 왔다.


‘생각해 둔 여배우는 있어?’


여배우라.. 영화가 개봉하면 관객의 눈에 보이는 건 배우 얼굴 뿐인데 생각해 둔 여배우가 왜 없겠는가. 평소 같이 하고 싶은 여배우가 한 둘이 아니어서 누굴 골라야 할 지 모르겠네? 내가 먼저 이 여배우랑 하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물어봐줘서 고마웠다.


‘어떤 역?’

‘주인공 아내 역.’

‘있기는 하지.’

‘그럼 정리해서 알려줘.’

‘위에서부터 시작해도 돼?’

‘너무 스타는 말고.’

‘언제까지?’

‘빠를 수록 좋아.’

‘알았어. 최대한 빨리 정리해볼게.’


문득 ‘꼴리는 영화’ 캐스팅 단계에서 대략 반 년간 30여명 정도의 여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가 까인 기억이 떠올랐다. 스타급까지도 아니고 그냥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여배우들에겐 다 까였다고 보면 된다.


어떤 매니저는 자기네 여배우에게 내 시나리오를 보여줬다가 다시는 이딴 거 주워오지 말라고 쌍욕을 처먹었다며 나를 원망했고 어떤 캐스팅 디렉터는 시나리오를 이 따위로 쓰면 캐스팅은 불가능이라며 묻지도 않은 작법 노하우를 전수해주기도 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런 시나리오를 읽고도 출연을 결정한 배우들이 신기할 뿐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고마워 해야 마땅하고 실제로도 고맙지만 우린 다시는 만나면 안 된다.


내 코가 석자다.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데 누굴 챙겨주고 말고 할 때가 아니다. 나의 부족한 연출력을 연기로 커버해줄 수 있는 비주얼과 스타성을 겸비한 여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여배우는 내가 캐스팅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분이 출연해주시는 거지.


만약 그런 귀인이 나를 선택해주지 않는다면 출연해주시는 여배우가 아니라 내가 출연시켜주는 여배우와 함께 해야 하는데 이왕 내가 누군가를 출연시켜줘야 한다면 정말 심사숙고해서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싶다.


여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는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이 작품이 내 인생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 배은망덕한 여배우와는 일하고 싶지 않다. 연기는 기본이고 관건은 고마워할 줄 아는 지 여부다. 출연시켜줬으니까 당연히 남은 평생 감사하며 명절마다 감사 인사와 선물을 보내주려니 방심하면 안 된다. 배우들은 메타인지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내가 출연시켜준 게 아니라 본인이 출연해준 줄 알기 쉽다.


‘꼴리는 영화’는 야심을 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다 망했다. ‘가족사냥’은 탑스타 차민오가 캐스팅 되어 있으니 야심을 가져도 된다. 문제는 차민오가 탑스타긴 하지만 한 물 가기 직전이고 감독의 전작은 ‘꼴리는 영화’인데다가 설상가상 19금 씬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십중팔구 차민오 급의 여배우들은 출연을 거절할 테니 적당한 레벨의 여배우로 타협하는 게 답이지만 한 번 타협하기 시작하면 결국엔 폭망 엔딩이다. 타협은 절대 없다.


답은 하나다. 내 작품으로 데뷔하는 신인 여배우. 데뷔만 안 했을 뿐 닳고 닳은 지망생이나 중고 신인은 안 된다. 진흙 속의 진주 또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발굴해야 한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대학로 연극 무대부터 시작할까? 아니면 인스타 투어? 생각만해도 피곤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겠지만 원석을 발굴하려면 발로 뛰는 수 밖에.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가 됐지만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톡으로 주고 받을 순 없어서 바로 석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괜찮아?”

“좀 이따 회의여서 잠깐만 괜찮아.”

“캐스팅 말인데 빠르게가 중요한 것 같진 않아.”

“그렇긴 하지. 부담갖지 마. 그냥 최 감독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여배우는 나를 믿고 맡겨줄 수 있을까? 진짜 중요한 거잖아!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제대로 발굴하고 싶어. 이왕이면 참신한 마스크의 깨끗한 이미지의 신인 여배우로.”

“깨끗한 이미지의 신인이라.. 표현 참.. 행여나 너 혼자 연락하고 접촉하고 그러진 마. 막 인스타 같은 데 돌아다니면서 감독이랍시고 DM 같은 거 보내려는 건 아니지? 설마 이미 움직이고 있는 거야?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석 팀장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캐스팅이라는 게 나 혼자 움직인다고 될 일은 아니잖아. 셀렉은 내가 해도 연락은 피디가 해야지.”

“그러니까 넌 아무 것도 하지 마. 만약 뭔가 하고 싶어지더라도 꾹 참고 무조건 나한테 컨펌 받고 움직여. 절대로 여배우들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미팅 같은 거 잡지 마.”

“당연하지. 그런데 후보는 몇 명 정도면 될까?”

“내가 괜한 걸 물어본 듯. 최 감독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연출에만 전념하는 게 좋겠어. 여배우 후보는 우리가 리스트업해서 보내줄게.”

“무슨 소리야! 캐스팅도 연출인데 나도 같이 해야지. 이번 주 안으로 러프하게 정리해볼게. 대여섯명 정도면 되겠지?”

“에휴. 너무 공들이진 말고. 최 감독의 머리 속 그림만 알고 싶은 거니까.”


석 팀장과의 통화를 마치고 하루 종일 가상 캐스팅 작업에 올인했다. 주인공 아내가 30대 중반이어서 실제로도 30대 중반의 요즘 뜨는 중이거나 얼마 전에 떴거나 아직 안 떴지만 앞으로 뜰 것 같은 여배우들 위주로 살펴봤는데 30대 중반의 참신한 마스크의 깨끗한 이미지의 신인 여배우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야 할 지 감조차 오질 않았다. ‘가족사냥’이 내가 쓴 시나리오가 아니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여배우들 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다들 서연과 비슷한 이미지였다. 미련이 남은 걸까?



***



가상 캐스팅 작업에 열중하다 지하철 끊길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바람 피우냐는 추궁이나 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현재 진행형도 아닌데 그저 억울할 뿐이다. 하지만 유정이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무조건 부인해야겠다 작정하고 집에 갔더니 유정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세미는 아빠가 와도 내다 보지도 않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엄마 아직 안 왔냐고 물었더니 굳게 닫힌 방 문 너머로 모른다는 퉁명스러운 한 마디만 들려왔다. 얼마 전에 주차장에서 묻지마 테러 사건도 있던 터라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통화가 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되어 있길 바라며 침대에 누웠지만 무슨 사고라도 당했으면 어떡하나 싶어 잠은 오지 않았고 새벽 2시가 넘어가자 분노가 치솟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엿 먹이나? 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인정한 것도 아닌데 변명이라도 들어야 되는 거 아닌가! 증거를 확보한 것도 아니면서 무고한 사람을 잡으면 안 되지.


보나마나 증거는 없을 것이다. 끽해야 제보 정도? 증거도 없으면서 사람을 떠 본 것 같아 화가 났지만 찔리는 구석이 없지는 않아 노심초사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나가면 지는 거라 살짝 뜸을 들이고 나가려는데 세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왤케 늦었어!”


내가 궁금한 걸 세미가 물어봐주었지만 유정은 대답 없이 안방으로 들어왔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본 척 만 척 잘 준비를 했다. 계속 말이 없길래 나도 가만 있었더니 찬바람만 쌩쌩 불고 숨이 막혔다. 무표정으로 돌아다니는 유정이 너무 낯설고 무서워 살살 눈치만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전화는 뭐야? 전화는 왜 안 받고! 하루 종일 걱정했잖아?”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유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유치하게 왜 이래? 계속 말 안 할 거야?”


내가 아는 유정이 아닌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라도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유정이 샤워하러 화장실에 간 사이 슬그머니 안방에서 나와 작업실 겸 서재 겸 쪽방으로 몸을 옮긴 후 조용히 문을 잠궜다.


적어도 오늘은 한 침대에서 자면 안 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흉흉한 일이 많은데 자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 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이다. 하루 종일 노심초사 + 가상 캐스팅 작업으로 에너지 소모가 컸는지 바닥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밀려왔고 어째 이 집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웠다.


인생 헛살았다.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면 뭐 하나. 가장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데. 하지만 ‘가족사냥’으로 3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다면? 존경하지는 않더라도 존중은 하겠지? 역시 대박 감독으로 거듭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르륵 잠이 들었는데 묘한 꿈을 꾸었다.


어두컴컴한 극장에 혼자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잠시 후 환하게 불이 켜짐과 동시에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서 주변을 둘러보니 객석은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정장과 드레스 차림의 외국인 비율이 압도적이었고 극장 인테리어가 뤼미에르 같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칸느 영화제에 진출한 것이다.


내 오른 쪽 옆자리에는 차민오가 앉아 있었고 앞 자리의 석 팀장은 몸을 뒤로 돌려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올려 주었다. 박수 소리가 점점 커지며 하나 둘 씩 일어나더니 결국엔 관객 모두가 나를 향해 기립 박수를 보내주었다. 어쩐지 내가 걸작을 만들었고 우리 집과는 달리 여기선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박수 소리는 대략 10여분 간 지속되다 잠잠해지려는데 갑자기 왼쪽에서 향기로운 뽀뽀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몸에 딱 붙는 고급진 검정 드레스 차림의 서연이 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축하해요 감독님! 드디어 꿈을 이루셨군요!”


뭔가 멋있는 말을 하고 싶은데 떠오르질 않아 머뭇거리고 있자 서연은 내 품에 쏙 안기며 이번에는 입술에 수줍은 뽀뽀를 해 주려는 찰나 정신이 번쩍 들며 잠에서 깨버렸다. 사십대 중반에 이런 꿈을 꿨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쪽팔렸지만 아무도 모를테니 천만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칸느 영화제에 진출해서 10여분간 기립박수라니 사람 일 모른다지만 죽기 전에 그럴 일이 있을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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