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직원이 회사 대표에게 들은 들으면 안 되는 말

093.

by Zinn


죽기 전에 칸느 영화제에 진출해서 10여분간 기립박수를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양서연 피디에게 왼쪽 볼에 뽀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쩐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꿈 속에서 축하 포옹과 뽀뽀를 해 준 서연이를 빨리 보고 싶어서 일찌감치 찬바람 쌩쌩 부는 집에서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꿈은 반대라지만 ‘가족사냥’으로 칸느에 갈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만약 내가 칸느에 간다면 인간승리의 주인공으로 포장 가능하다. 어린 나이에 데뷔작으로 칸느에 가는 건 인간승리가 아니다. 스타 감독과 배우가 메이저 투자 배급사에서 만든 영화로 칸느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 요즘엔 사람들이 영화에 관심이 없어서 이 정도는 이슈도 못 된다.


하지만 데뷔와 동시에 폭망했다가 10년 만의 차기작으로 칸느에 진출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세상은 언더독을 응원하는 법. ‘경쟁부문’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주목할 만한 시선’ 진출에만 성공해도 폭망 후 비참했던 지난 10년간 있었던 일을 그럴 듯 하게 포장해서 에세이를 내도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만약 황금종려상을 받는다면? 그 때는 단순 영화감독이 아니라 셀럽 등극, 위인전 출간과 동시에 향후 30년은 영화감독 타이틀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이번엔 목숨 걸고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서연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당연하다. 내가 너무 일찍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이 출근할 때도 서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휴가라도 갔나? 넘 궁금했지만 카톡으로 물어봤다간 서연에게 관심이 있다는 기록이 남을까봐 해 질 무렵 석 팀장이 혼자 있을 때 접근해서 은근슬쩍 던져보았다.


“퇴근 안 해?”

“해야지.”

“저녁 약속 있어?”

“아니.”

“간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글쎄.”

“다른 피디들도 아직 퇴근 전이면 같이 먹고. 어라? 그나저나 양 피디가 안 보이네?”

“못 볼 거야.”

“아니 왜?”


석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퇴사할 것 같아.”

“퇴사? 퇴사면 퇴사지 ‘할 것 같은’은 뭐야?”

“아무 말 없이 며칠 째 안 나오고 있거든. 내 연락도 안 받네.”

“뭔 일 있었어?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데?”

“대표님이랑 나랑 셋이서 저녁 먹은 날이니까 엊그제였나?”

“왜 그러지? 강 대표에게 고백 공격 같은 거라도 당했나? 헤헤.”

“고백 공격?”

“아니 강 대표가 유독 양 피디에게 스윗한 것 같더라고. 징그럽게.”


웃자고 한 얘기지만 석 팀장은 웃지 않았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양 피디랑 연락 되니?”

“아니? 왜? 연락해보라고?”


얼씨구나다. 석 팀장이 시켰다고 하고 바로 연락해봐야겠다.


“음.. 아니다. 하지 마. 괜히 긁어 부스럼 될 수도.”

“난 괜찮으니까 연락 해 볼게. 그런데 뭐야?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일인데?”

“몰라도 돼. 최 감독님은 연출에만 전념 해.”

“이러면 연출에 집중이 안 되지! 같이 일하던 피디가 말도 없이 퇴사한다는데!”

“나도 확실히는 몰라. 좀 걸리는 게 있긴 하지만. 아 이건 말 못하겠다.”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러기야! 나 빈정 상한다?”

“강 대표한테 양 피디가 무단 결근했다고 보고하니까 만약 퇴사한다고 하면 잡지 말고 인센티브를 후하게 챙겨주라더라고.”

“뭘 했다고 인센티브? 아니 얼마나 챙겨주라는데?”


석 팀장이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3천만원.”

“3천?? 어째 깽값이나 불미스러운 일 생겼을 때 합의금 수준인데.”

“그렇지? 그냥 용돈 느낌은 아니지?”

“안 물어봤어? 왜 3천씩이나 챙겨 주냐고?”

“물어봤지. ‘가족사냥’ 메이드에 기여했다고 챙겨 주는 거래. 어찌됐건 최 감독한테 시나리오를 받아서 우리에게 전달해 준 건 양 피디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가족사냥’ 시나리오를 석 팀장에게 다이렉트로 건네준 게 아니다. 임 감독의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재회한 구창한 작가가 그동안 쓴 시나리오 모니터를 부탁한다며 파일로 보내온 걸 집에서 출력하면 종이랑 잉크 아까워서 밀리언필름에서 출력하려고 양 피디에게 출력을 부탁했고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양 피디가 내 허락도 없이 시나리오를 읽어보고는 석 팀장에게 전달한 게 팩트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메이드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게 맞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3천은 말이 안 되지. 강 대표랑 양 피디 둘 사이에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터진 것도 아닐텐데! 그리고 셋이 같이 있던 자리에서 그런 일이 있어 봤자지!”

“둘만 있었어. 나는 먼저 일어났거든.”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셋이 함께 있다가 석 팀장이 먼저 빠졌다면 강 대표로서는 절호의 찬스였을 것이다. 내가 강 대표라도 서연을 순순히 집으로 보내주긴 싫었을 것이다. 물론 나야 서연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줬겠지만 강 대표는 다르다. 분명 어디 가서 한 잔 더 하자고 했을 것이고 서연으로선 폭망 감독이 아니라 회사 대표의 말이니 거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비싼 호텔 같은 곳에 있는 분위기 좋은 바로 데려가 길고 복잡한 이름의 칵테일을 시켜줬을 것이고 서연은 인스타에 올릴 생각에 신나서 겁도 없이 벌컥 벌컥 마셨을 것이고 그 다음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둘이 밥만 먹고 헤어지진 않았겠지?”


확인 사살차 물었는데 석 팀장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얼른 짐을 챙겨 밀리언필름에서 나오자마자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궁금해고 걱정이 돼서 참을 수가 없었다. 통화가 안 되면 조재웅에게라도 전화를 걸어 보려고 했는데 서연은 예상 외로 금방 받았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침울한 목소리는 아니고 예상 외로 차분하고 사무적인 톤이었다.


“양 피디도 안녕? 잘 지내지?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을 통 못 본 것 같아서.”

“감독님 옆에 누구 있어요?”

“아니. 혼자야.”

“퇴사할까 해요.”

“왜? ‘가족사냥’도 메이드시켜줬는데 촬영 끝나고 개봉할 때까지는 다녀야지. 대박나면 보너스도 받고!”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어서요.”

“무슨 말을 들었는데? 누구한테?”

“대표님한테요.”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는 건 무슨 말일까?”

“그건..”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강 대표 이 덜 떨어진 영포티 새끼가 감히 20대 여직원에게 고백 공격을 시전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도 없이 무단 결근 해도 퇴직금 아니 깽값을 3천만원이나 챙겨주라고 했겠지. 어떻게 자기 회사 여직원에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건지 같은 남자라도 강 대표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도대체 서연이 강 대표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석 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강 대표와 둘이서 어디를 갔는 지를 알고 싶었는데 서연은 전화로는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했다.


이 타이밍에서 말도 안 되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강 대표의 고백을 받아줬고 이제부터 사귀기로 했다는? 그래서 오늘부터 1일이라는? 남녀 사이는 둘만 아는 법이라지만 에이 아닐 거야. 서연을 믿는다. 석 팀장이 먼저 일어난 다음 둘이서 저녁만 먹고 집에 갔을 거야. 그냥 흔한 영포티 개저씨의 고백 공격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겠지.


“암튼 도저히 못 다니겠어서요.”

“그래 잘 생각했어. 우리 양 피디는 피디만 하기엔 아까워. 감독 데뷔해야지. 나도 도울게.”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감독님. 안 그래도 여쭤볼 게 있었는데 다시 연락드릴게요.”

“나한테? 뭔데?”

“그것도 만나서요.”

“알았어. 너무 궁금하지만 건강 잘 챙기고.”


이런 개 쓰레기 같은 놈을 봤나. 도대체 스무살 가까이 어린 딸 같은 애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한 거야? 말 만으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퇴직금으로 3천만원이나 챙겨주라고 했다는 걸 보면 말 만으로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백 공격 값으로 3천만원은 투머치다.


문득 서연과는 이번 통화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밀리언 필름이라는 연결 고리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통의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 대표 때문에 퇴사하는 마당에 ‘가족사냥’의 연출부나 스크립터로 부를 이유도 없다.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 건 그냥 하는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함께 일하는 사이도 아닌 40대 유부남에게 궁금할 게 있을 리가. 그래도 만약 있다면 뭘까? 설마 고민상담? 사실은 강 대표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같은 중년 남자로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에이 아닐 거야. 만약 그런 게 궁금하다는 건 강 대표와 사귈 마음이 조금은 있다는 뜻인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절대 반대다.


다시 생각해보니 서연이 빈 말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분명 만나서 뭔가 물어볼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뭘 물어볼지 궁금해 하던 차에 카톡이 울렸다. 만날 약속을 정하려는 서연의 카톡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혜나였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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