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과도 같은 작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꼴

094.

by Zinn


왜 그러셨다니? 내가 뭘 어쨌다고? 캐스팅 확답을 주지 않으니 그 날 밤 공연 끝나고 대학로 모텔에서 있었던 일을 꺼내려는 것 같은데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걱정해줬더니 이런 식으로 나오나? 캐스팅 시켜줄 때까지 협박의 강도를 높이려는 절박한 심정은 너무나도 잘 알겠지만 이건 매너가 아니지.


그리고 왜 그러긴 뭘 왜 그래? 그 날 밤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왜 그러고 자시고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자기도 양심이 있으니 주연까지 바라지는 않을테고 나로서는 혜나에게 조단역이라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일 뿐이다.


‘잘 지냈어?’

‘…’

‘오랜만이네 별 일 없지?’


첫 안부를 묻는 카톡에 답이 없어서 다시 한 번 물었는데 여전히 읽씹이었다. 날 도발하려는 게 분명하다. 이럴 때 일수록 차분해야 한다. 같이 흥분하면 공멸이다.


‘그런데 왜 그러셨다는 게 무슨 말이야?’


혜나는 계속 읽기만 하고 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어디선가 술에 잔뜩 취해 나에게 주사를 부리는 것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으려는데 드디어 답톡이 왔다.


‘모텔에는 왜 끌고 가셨어요?’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끌고 가다니! 아니 이게 무슨.. 누가 누굴 끌고 갔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 날 분명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상호 합의 하에 모텔에 갔다. 어이가 없어서 곧장 사실 관계 정정을 위한 카톡을 날리려다 타이핑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다. 끌고 간 게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함께 모텔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괜히 사실 관계를 정정하겠다고 카톡을 주고 받다간 내가 혜나와 함께 모텔에 간 걸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남녀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기성 감독이 캐스팅을 빌미로 무명 여배우를 모텔에 데려 간 파렴치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끌고 갔든 합의해서 나란히 손 잡고 갔든 카톡으로 여배우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나에겐 리스크다. 내일이 없는 무명 여배우가 앞날이 창창한 감독에게 자신을 왜 모텔에 끌고 갔냐고 묻고 감독은 내가 언제 끌고 갔냐 서로 좋아서 간 거 아니냐고 답하는 대화를 나눈 기록이 유출되기라도 했다간 감독이고 뭐고 다 끝장이다.


만약 혜나가 우리의 카톡 내용을 인스타그램에 올려버리기라도 한다면? 아무래도 지금 술 취해서 주사를 부리는 것 같은데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식은 땀과 함께 눈 앞이 캄캄해지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아직까진 괜찮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나의 일방적인 폭주를 이대로 방치할 순 없기에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질 않고 계속 카톡만 날아왔다.


‘이혼하실 거죠?’

‘대답이 없으시네요? 이혼 안 하세요?’

‘이혼도 안 할 거면서 저한테 왜 그러신 거에요?’


통화가 되질 않으니 무응답이 최선이지만 계속 아무 대답도 안 했다간 혜나가 어떻게 나올 지 몰라 두려웠다. 목소리라도 들으면 혜나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응을 할 텐데 카톡만으로는 어떤 상태인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오랜 무명 생활에 캐스팅 희망고문이 길어지자 미쳐버린 걸까? 통화 한 번으로 정상으로 돌려놓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내가 혜나를 모텔에 끌고 갔다는 사실 관계만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전화 할까? 통화 가능해?’

‘아니요.’


어쩔 수 없다. 최소한 끌고 갔다는 사실만이라도 부인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


‘끌고 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날 자기가 한 말 기억 안 나?’


나는 아직도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데뷔와 동시에 폭망 후 10여년 간 좌절과 실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다가 처음으로 뿌듯한 성취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저녁 8시쯤 대학로에서 심동민을 만나 함께 혜나의 연극 공연을 봤고 끝나고 나서는 혜나와 셋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2차로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심동민은 먼저 집으로 갔고 나는 혜나와 둘이서 술을 더 마셨다. 그러다가 혜나가 먼저 가게에서 나갔지만 잠시 후에 두고 간 게 있다며 돌아와서는 나를 두고 갔다며 내 품에 쏙 안겨왔고 자길 못 믿냐며 먼저 모텔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처 모텔로 직행했고 내가 모텔비를 현금으로 결제하려고 하자 혜나는 한 푼이라도 아끼라며 모텔비를 보태주었다. 비록 만 원이지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지. 섹스가 끝난 후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아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거냐고 물었고 혜나는 내가 잘 생겨서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따라 내 모습이 너무 슬퍼보여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마치 경찰서에서 진술서 쓰듯 그 날의 추억을 팩트 위주로 간략히 정리해 혜나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고 이번에는 금방 답이 왔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어요. 술집에서 기억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땐 모텔 침대 위였어요. 옆에는 감독님이 계셨고요. 저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혜나의 기억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분명 거짓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증거가 없으니 그저 억울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단지 캐스팅 때문에 이러는 것 같진 않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한참을 기다렸지만 혜나는 답이 없었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다. 뜬금없이 저한테 왜 그러셨냐고 톡을 보냈을 때 읽씹했어야 했다. 그나저나 내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 날 술을 마시긴 했지만 만취 상태는 아니었고 나는 다 큰 성인을 억지로 모텔에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쎄지도 않다.


이해가 안 된다. 캐스팅을 안 시켜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어울리지도 않는 협박을 하는 걸까? 여러모로 혜나답지 않은 행동이다. 문득 얼마 전에 혜나의 자칭 사촌동생이 혼자서 영화사로 찾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혜나와 연락이 안 된다며 며칠 전에 혜나가 날 만나러 나간다고 한 뒤에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설마 지금 내가 카톡을 주고 받는 게 혜나가 아닌가? 혜나답지 않은 카톡은 물론이고 통화를 거부하는 것도 수상하다.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드는 생각일 수 있지만 만약 혜나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고 핸드폰을 빼앗겼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자칭 사촌동생의 말에 따르면 혜나는 내 조감독에게 연락을 받고 나갔다고 했다. 아직 구하지도 않은 조감독을 사칭해서 혜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만한 용의자는 순순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10년 전 데뷔작에서 조감독으로 일해주었던 자승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나에게 조감독이라면 자승이뿐이고 이번 작품에도 조감독을 시킬 생각이긴 하니까.


“여보세요?”

“나다.”

“네 형.”

“너 혹시 혜나씨랑 통화한 적 있니?”

“혜나씨요?”

“여배우 혜나. 내 영화에 출연했던.”

“아~ 아니요. 전번도 없는 걸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별 건 아니고.. 너 이번에 조감독 해 줄 거지? 출근은 언제부터 가능할까?”


바로 전화를 끊으면 내가 혜나한테 관심있어서 전화한 줄 알까봐 얼른 조감독 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조감독을 구해야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조감독 만큼은 내가 편한 사람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자승이가 안 한다고 하면 모르는 애랑 천천히 알아가며 일을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10년 전 조감독 자승이가 한 번 더 조감독을 해 주는 게 베스트다. 자기 시나리오를 쓴다고는 하지만 쉰 지 오래돼서 몸이 근질근질 할 것이다. 현장 감도 살릴 겸 간만에 조감독 한 편 하라고 하면 얼씨구나 달려오겠지.


“글쎄요. 제가 최근에 일이 좀 생겨서요.”

“일? 니가 무슨 일이 생겨?”

“아직은 말씀드리기가 좀 그래요.”

“아 그러세요? 그러고보니 어떻게 지냈는 지를 안 물어봤네?”

“잘 지내죠.”


내 전화인 줄 알고 받았으면서도 딸랑 “여보세요?” 한 마디로 답할 때부터 쎄했고 “잘 지내죠.”란 대답에 불경의 기운이 담겨 있어서 괜히 전화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잘 지낼 리가 없는 걸 뻔히 아는 사람에게 잘 지낸다고 받아친다는 건 자기가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신경 끄라는 소리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진짜? 신기하네. 어떻게 잘 지낸다는 걸까?”


나보다 힘들면 더 힘들었지 잘 지낼 리가 없는데 뭔 소린가 싶어서 확인 사살을 했다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음.. 회사에서 아직 말하지 말랬는데 형이니까 말씀드릴게요. 저 계약했어요.”

“월세 계약?”

“아니요. 시나리오 한 편 팔았어요. 지난 번에 형한테 보여줬다가 욕 먹었던 시나리오 기억 나세요?”

“응 기억 나. 성체 줄기 세포 같다고 했던. 내가 욕을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게 욕이죠 뭐. 암튼 형한테까지 까인 이상 더 잃을 것도 없으니 박미나 한테 미친 척 하고 이메일로 보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연락이 오더라고요.”

“박미나한테는 죽어도 보내기 싫다더니?”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먹고 죽을 돈도 없었거든요. 형한테 꿔달라고 할 수도 없고요.”


살살 배가 아파왔다. 될 놈은 되는 걸까? 나의 야심작 ‘버진 어게인’을 매몰차게 거절한 잘 나가는 투자사 직원 박미나에게 고작 이메일 한 통 보낸 걸로 시나리오 계약이 성사됐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겐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만한 기적으로 느껴졌다.


“고마워요 형. 이게 다 형 덕분이에요. 이메일로 보내도 될 작품은 된다고 하셨잖아요.”

“거 봐. 내 말 맞잖아. 형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거야. 진짜 진짜 잘 됐다. 정말 축하해!”


내가 혹평하고 버린 자승이의 시나리오를 박미나가 계약 시켜줬다는 상황 파악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 번 괜히 전화했다는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 들었다. 영원히 내 조감독인 줄로만 알았던 자승이가 밀리언 필름 따위보다 훨씬 잘 나가는 메이저 투자 제작사에서 시나리오 계약을 한 것도 모자라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한 제작자의 지도편달을 받으며 시나리오를 디벨롭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진짜 고마운 건 형이 그 때 밀리언 필름에 저를 소개시켜주지 않은 거에요. 만약 밀리언 필름에서 계약하자고 했으면 당장 돈이 필요하니까 도장은 찍었겠다만 그 이후로는… 어우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목숨과도 같은 작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꼴이잖아요?”


생각만 해도 아찔? 쓰레기통? 이 새끼가 지금 밀리언 필름 소속 감독 놀리나?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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