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하나 팔았다고 벌써 감독이 된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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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n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밀리언 필름 소속 감독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시나리오 하나 팔았다고 벌써 감독이 된 줄 아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직 각색 중이면 시작도 못한 거고. 메이저에서 데뷔하려면 캐스팅고까지 최소 1년일테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됐다. 영화 한 편을 개봉시킨 선배 감독으로서 해 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듣지도 않을 테고 내 입만 아프다.


혹시나 내 조감독이랍시고 혜나에게 연락을 했나 확인하려고 전화했다가 괜히 배만 아프게 됐다. 넘어야 할 산이 많긴 하지만 넘기만 하면 누구처럼 폭망에 저주받은 데뷔가 아닌 축복받은 데뷔일테니..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자승인 혜나에게 전화를 한 범인이 아니다. 메이저 제작사와 각본 계약까지 한 마당에 구질구질하게 폭망 감독의 조감독을 사칭해서 무명 여배우를 불러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연락이 왔어도 피했겠지.


그럼 도대체 누가 내 조감독을 사칭한 거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구창한 작가. 본의 아니게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게임을 하게 된 것 같은데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두고 보자. 나도 창한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너 죽고 나 살자다.


자승에겐 각본 계약도 했으니 밥 한 번 사라고 했더니 당분간은 시나리오 수정 작업 때문에 시간이 안 난다며 이달 말쯤 마감 넘기고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촬영을 앞둔 나보다 바쁘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기만 했다. 밀리언 필름 따위에서 들어가는 영화랑은 비교하지 말란 뜻이겠지.


서연이야 아직 어려서 그런다 쳐도 이 놈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배은망덕한데다 의리도 없다. 비록 10년 전이지만 극장 개봉 영화의 조감독도 시켜주고 오늘 날까지 틈틈이 밥 술 커피를 사주며 좋은 시나리오를 쓰라고 덕담도 많이 해 줬건만 진짜 괜히 잘해줬다.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다.


길바닥에서 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잠깐 건물 벽에 기대어 쉬려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경진 감독님?”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키도 크고 호감형으로 깔끔하게 생겼고 옷도 세련되게 잘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배우인가? 싶었는데 모르는 얼굴이었고 어쩐지 ‘가족사냥’에 캐스팅 시켜달라고 다짜고짜 찾아온 케이스 같았다. 아직 크랭크인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유명세란 말인가?


“누구시더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코 앞에서 멈추더니 고개를 꾸벅 숙여 폴더 인사를 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잘 생기긴 했지만 연예인으로서의 끼가 전혀 느껴지진 않아 배우나 모델 쪽은 아닌 듯 했다.


“최경진 감독님 맞으시죠?”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김기훈이라고 합니다. 사모님과 같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개를 마치고는 잠깐 드릴 말씀이 있다며 조용한 곳으로 가 줄 수 있냐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서서 얘기하기엔 다리가 아픈데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아 순순히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 주문을 마치고 구석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어.. 어.. 왜 이러시는 거죠?”


행여나 기성 감독이 배우 지망생에게 갑질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화들짝 놀라 기훈의 사죄를 말리고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얼마 전부터 정체 모를 누군가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있다며 무조건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정과 절대로 선은 넘지 않았고 넘을 생각도 없었다며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었다.


“선을 넘어?”

“아니요. 절대 절대 안 넘었습니다.”


선은 넘지 않았다는 건 넘기 직전까지는 갔다는 뜻인가? 내 아내랑?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상황과 대사라 실감이 나지 않던 차에 그는 말로만 사과를 드릴 순 없다며 손가방에서 두툼한 종이백을 꺼내더니 정중하게 들이밀었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5만원권 뭉치가 비닐로 돌돌 말아져 있었다.


“천만 원입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기훈은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누군가가 나라고 생각하고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무슨 협박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협박을 한 적이 없고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나 설명해달라고 했는데 그는 절대로 내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으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협박도 멈춰달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협박을 받은 거냐고 다시 한 번 물어보니 자신의 아내에게 유정과의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선은 넘지 않았다면서 뭐가 문제지?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내가 아는 유정이라면 절대로 선을 넘진 않았으리라 믿기에 화가 나진 않았다.


비록 기훈이 나보다 어리고 잘 생겼고 키도 크고 돈도 많아 보여 짜증이 났지만 유정은 눈이 높다. 이 정도의 남자에게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천만 원이라는 금액도 신뢰가 갔다. 만약 1억이었다면 진짜로 선을 넘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텐데 천만 원 정도라면 끽해야 썸이겠거니 안심이 됐다. 뭣보다 아무리 봐도 선을 넘었으면서 천만 원으로 퉁치려는 사람 같진 않아 보였다.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나를 찾아올 게 아니라 빨리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지만 그는 괜히 경찰에 신고했다가 일이 커져서 장인 장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간 큰일 난다며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기훈의 처가가 얼마나 대단한 집 안이길래 이렇게 벌벌 떠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그 대단하다는 처가에 대해서도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종이백에 담긴 천만 원 역시 받을 순 없었다. 아깝긴 했지만 정중하게 사절하며 나는 협박범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 찾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고 유정도 스토킹 협박을 당하고 있다며 유정의 스토커는 분명 자기를 스토킹 중인 누군가와 동일범일테니 아내가 스토킹 당하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해 주시면 안 되냐고 애걸복걸했다.


내가 유정의 남편이니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재차 신고를 부탁했지만 유정이 스토킹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부부관계가 한동안 소원했던 건 사실지만 만약 스토킹을 당하고 있었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만 원이 욕심나긴 했지만 내가 협박한 것도 아닌데 괜히 받았다간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아 다시 한 번 돌려주려고 했더니 기훈은 한사코 사절하며 냅다 도망가버렸다.


천만 원을 길바닥에 버릴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가져왔다. 어디에 둬야 하나 고민 끝에 장농 깊숙이 넣어뒀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은 뒤 찬찬히 생각해보니 누군가 정체를 숨기고 유정을 스토킹 했다면 용의자는 역시나 딱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구창한 작가. 음흉한 게 딱 구 작가다웠다. 당연히 유정과 기훈은 선을 넘진 않았을 것이고 썸 정도는 타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는데 평소 유정을 마음에 두고 있던 창한이 둘의 관계를 오해하고는 스토킹 협박범으로 돌변했다면 말은 된다. 정체를 숨긴 채 스토커인 척 하면서 유정을 괴롭히다가 유정이 더 이상 못 참고 창한에게 SOS를 요청하면 늘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처럼 쉽게 해결해주고 유정의 마음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지하 주차장 헬맷남 테러 사건 때 유정을 구해준 걸로 경계심을 해제했으니 한 번 더 도움을 주면 완벽하게 유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겠지. 같은 맥락에서 나와 혜나의 하룻밤 불장난을 유정에게 제보한 것도 창한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정과 나를 이간질 시키기 위해. 혜나를 시켜 협박 문자를 보내게 한 사람이 있다면 그도 창한일 것이고.


유정도 여자다. 섹스리스 10년차(?)이니 남자가 그리웠을 수 있다.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선을 넘었다면 그건 다 내 잘못이다. 그런데 창한은 지가 남편도 아니면서 왜 분노한 걸까? 유정이 바람을 피우든 말든 남의 집안 일 아닌가? 유정이 나랑은 섹스리스인 걸 알고 순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썸을 타는 상대가 있다는 걸 알고 더럽혀지기 전에 조치를 취한 걸까?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우리 가족을 사냥할 계획이었다면 유정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순결한 사냥감에 외간 남자라는 더러운 불순물이 묻는 걸 용납할 수 없었겠지. 협박범의 정체가 창한이라는 심증이 확실했지만 이 역시 경찰에 신고할 순 없었다.


유부남 유부녀 교사의 불륜과 스토킹에 남편은 탑스타가 캐스팅된 영화의 기성 감독이라면 백프로 신문 사회면과 연예면의 탑에 오르내릴 것이다. 게다가 그 유부녀 교사의 영화감독 남편이 무명 여배우에게 성상납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고 담당 프로듀서와는 불륜 관계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폭로됐다간 감독 하차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촬영이 다 끝나고 개봉 전까지는 무조건 조용히 넘어가야 한다.


어찌보면 차라리 잘 된 걸 수도 있다. 가족 같은 사이를 핑계로 창한의 작품을 도둑질 한 걸 용서받으려고 했는데 아내를 스토킹한 것도 모자라 애초에 ‘가족사냥’은 창한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크므로 ‘가족사냥’을 내 작품으로 만들 명분이 2개나 생겨버렸다.


임 감독의 갑질과 가스라이팅으로 신인 작가 떨구기 수법을 벤치마킹해서 억지로 구 작가를 떨궈내려 했다간 자살 당하거나 뺑소니 또는 사회적 매장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어차피 내 성격에 갑질이나 가스라이팅은 무리였다. 하지만 아직은 창한에게 “난 네가 스토킹 협박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카드를 쓸 타이밍은 아니다. 히든카드로 남겨두자. 유정에게 외간남자 기훈과의 썸을 따지는 것도 개봉 이후다. ‘가족사냥’이 대박난다면 부와 명예를 겸비한 이혼남으로 새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다.


12시가 다 되어가지만 오늘도 유정은 귀가 전이었다. 학교는 진작에 끝났고 기훈과 함께 있지도 않을텐데 이 늦은 시간까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추리하던 중 생각만 해도 짜증나는 그림이 그려졌다. 내가 예전에 가출했을 때처럼 창한의 집에서 편히 쉬고 있는 그림이다. 문제는 세미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남편이 있는 집 구석에 들어오기 싫어서 창한의 집에서 쉬고 있다면 유정은 지금 젊고 잘 생기고 몸도 좋고 돈도 많고 여러모로 능력 있는 창한과 단 둘이 있는 것이다. 남편 욕하면서 또는 위로받으면서?


히든카드고 뭐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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