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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한 마음 Feb 05. 2021

나만의 슈필라움을 꿈꾸다.

동네 책방 '읽다 익다'에 가다.


독서모임을 다니던 책방이 이전을 했다. 원래 있던 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확장해 이전을 하는 것이라 모임 멤버들 모두 한마음으로 축하해주었다. 가 오픈일이 다가왔지만 코로나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5인 이상 규제로 인해 모임은 계속 미뤄졌다. 오픈 소식을 듣고 단톡 방에서 축하인사를 전하긴 했지만 새 공간이 궁금하기도 하고 적적히 책방을 지키고 있을 책방지기님을 생각하니 먼저 찾아가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마침 책방 모임을 함께 다니던 명희쌤이 연락이 와서 같이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다행히 바쁜 일도 끝낸 직후라 콜! 을 외쳤고 우리는 당장 그날 오후 책방으로 향했다.     


이전한 동네는 잘 알고 지내던 선배 부부가 사는 동네라 길이 눈에 익었다. 이 동네가 뭔가 인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칠 즈음 나는 그곳에 당도해있었다.


책방은 멀리서 봐도 시선을 잡아 끌만큼 그 외관이 두드러진 데가 있었다. 그곳이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시선이 반영되기했을 만 말이다. 일단 인도 안쪽으로 테라스가 넓게 자리해서 일렬로 쭈욱 이어지는 다른 가게들과는 분명히 구별되어 보였다. 하얀색의 제법 크고 널찍한 건물, 통창 너머로 아늑하고 노란 불빛이  가득한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앞에 높게 우뚝 솟은 네모난 기둥 같은 설치물에도 시선이 갔는데, 각각 면을 달리하여 책방 이름과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 나오는 명구를 넣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참 주변 외관을 둘러보고 나니 명희쌤이 도착했고 맞은편에 있는 마트에 들러 과일 한 박스를 사서 책방으로 들어섰다.     


책방 내부는 예상했던 대로 ‘와~’ 하는 감탄사가 멈추지 않을 정도로 근사했다. 물론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규모나 구조 같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따뜻하고 아늑하면서도 세련된 그 공간은 우리가 입을 모아 여러 번 말한 것처럼 딱 책방지기님 다운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곳이라 여기 때문이다. 주인장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느낀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녀의 내밀한 취향과 매력을 충분히 알아볼 만큼 서로를 지켜봐 왔고 가까워졌다는  의미이리라.   

 

내가 그녀의 책방을 처음 찾은 때가 작년 유월쯤이었으니 벌써 구 개월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집에서 차로 사십 분 거리의 책방 모임을 꾸준히 오간 것은 책에서 얻는 삶의 지혜와 이야기들을 나누는 따한 시간이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책방 지기님을 만나고픈 이유컸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 있고 진지한 태도에서도 많은 걸 배웠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과 모임을 이끄는 탁월하고 따뜻한 리더십매번 속으로 탄복하곤 했다. 이 세계에서 참 닮고 싶은 몇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주인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밴 공간이니 내가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나 말이다.    


카페 이곳저곳에 자리한 빈티지 테이블과 책장도 멋스러웠지만 구석구석에 자리한 소품들 하나하나 그녀의 세심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구나 하며 우리는 간만에 눈 호강을 실컷 했다. 아, 공간이란 이런 것이구나, 한 사람의 취향과 체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의 맛’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며 신선한 자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카페의 시그니처 커피라는 아인슈페너와 머핀을 주문하고 계산대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간의 묵은 수다를 한참이나 쏟아냈고, 중간에 책방지기님도 합류해 지난했던 인테리어 과정과 그동안의 근황을 나눴다. 한참 고대했던 시간이니만큼 우리의 수다는 진하고, 달고, 맛났다. 깊고 풍부한 크림 위에 시나몬가루가 솔솔 뿌려진 아인슈페너 못지않게 말이다.     


아인슈페너 한 모금, 수다 한 모금


새로운 공간을 마주한 날이니만큼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주된 화제가 되었다. 책방지기님은 카페 시설물에도 적혀있던 ‘슈필라움(spielraum)’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주체적 공간’을 뜻하는 용어인데, 독일어 ‘놀이(슈필)’와 ‘공간(라움)’의 합성어라고 한다. 휴식뿐만 아니라 온전한 자기다움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 공간을 가리키는 이 용어는 우리말로는 대체할 말이 없어 원어 그대로 사용한다고 한다.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며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라니,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 공간을 실재적으로 구현해내고 다른 이의 삶과 꿈의 실현에도 기여하려 애쓰는 책방지기님이 참 멋지다고 나는 또 한 번 느꼈다.     






유학길에서 돌아와 여수의 어느 바닷가 미역 창고를 진짜 미역창고(美力倉考 :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 사고를 한다)로 만들어버렸다는 심리학 교수 김정운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곳에 한번 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대구에는 내가 애정 하는 ‘읽다 익다’가 있으니까,

그곳에 슈필라움의 좋은 본보기가 있으니까 말이다.


슈필라움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가 거하는 집안의 어느 작은 공간 한 켠에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언젠가 나도 독립된 나만의 근사한 슈필라움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가만히 품어본다.    


대구 신매동에 위치한 책방 '읽다 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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