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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한 마음 Oct 15. 2020

내가 딸을 낳고 싶지 않은 이유

기억을 주워 담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산부인과에서 성별을 알려 주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초음파를 하며 선생님이 가리키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우리 부부의 얼굴에 각자 희비가 교차했다. 아이는 보란 듯이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기에 “여기 보이시죠?”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에 의문을 달 필요가 없었다. 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동시에 남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졌다. 그는 그날 식음을 전폐했지만 다행히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들도 괜찮아. 얼마나 든든하겠어? 그리고 첫째가 아들이면, 굳이 둘째를 꼭 낳아야 하는 부담감도 없을 테고.” 그랬다. 우리가 딸을 낳았다면 아들을 바라시는 양가 어른들의 은근한 압박에 못 이겨 아마 둘째도 가졌을 것이다. 나로선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내가 아들을 바랐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나 같은 딸을 낳고 싶지 않아서였다.

더 분명히 이야기하자면 딸을 나처럼 키우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어쩌면 그것은 딸이고 아들이고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일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저 내가 딸인 게 싫었다.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게 늘 한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부모에게 더없이 순종적이고 착한, 집안의 살림밑천까지 되어준 든든한 맏딸이었다. ‘순종적이고 착한’이라는 수식어 부모님 두 분 모두 동의하실지 의문이 들지만, 든든한 딸이었다는 데에는 우리 가족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나는 그런 딸이었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지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장남으로 어린 시절 한 번도 땅에 발 닿을 일 없을 만큼 귀하게 자라셨다는 아빠는 내게 이런 말씀을 종종 하시곤 했다. “맏이는 하늘이 내는 거란다. 구약시대에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치는 제물은 제일 처음 난 것, 첫 양이지.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 첫째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는 그런 존재야. 딸아, 너는 내 귀한 첫 열매란다.”

아빠는 내가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귀한 첫째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툭’하고 건드리면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낡고 다 쓰러져가는 집을 지탱할 마지막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한 건.    


부모님의 계속되는 사업실패와 끊임없는 두 분의 불화는 십 대 후반이었던 나를 늘 불안에 짓눌리게 했다. 막내가 지금 여섯 살인 내 아이보다 더 어린 시절이었기에, 의지할 만한 누군가를 찾기보다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두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품고 살았다. 그땐 당장이라도 부모님 두 분 중 한 분이 스트레스로 인한 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 두 분 다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빚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매일 그런 불안을 무거운 돌덩이처럼 이고 지고 다녔다. 그 후로 끝없이 이어진 내 이십 대의 무기력도 아마 같은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다행히 부모님은 이십 년이 흐른 지금도 큰 병 없이 살아 계시고 이혼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나는 그 짧지 않은 세월동안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자잘한 건강상의 이유로 수술대에 두어 번 오르기도 했지만 부모님께 씀드린 적은 없었다.






작년 여름 자궁내막과 난소에 생긴 용종을 떼어내는 복강경 수술을 받던 날, 오후 수술을 앞두고 병실에 누워 있는데 출근한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인어른이 어떻게 아셨는지, 미리 본인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내 딸 몸에 칼을 대는데 어떻게 감히 본인에게 알리지 않았며, 화가 나서 전화로 쌍욕을 퍼부으셨다고.. 네가 전화해서 수습 좀 하라고. 그 뒤를 이은 엄마의 다급한 전화. 여러 차례 고성이 오가고 실랑이를 벌이고 몇 번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에야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너무 화가 났다. 비록 생사를 오가는 큰 수술도 아니었지만, 출산 후의 여성에게 흔하게 생길 수 있는 자궁과 질환이라 하지만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오르는 나를 진심으로 염려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에게 이러는 거지?
왜 다들 내게 이리 무례한 건데?
내가 얼마나 더 참고 견뎌야 하는데?”    



수술대에 오르는  딸이 염려되고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이 야속한 부모님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나. 속상해서 술을 드시고 취했다는 핑계로 사위에게 그런 쌍욕을 입에 담으셨다는 아빠도, 혼자 입원 수속을 밟고 심란한 맘으로 수술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친정아빠의 말을 그대로 전하며 네가 알아서 수습하라고 고함치던 신랑도. 네가 예민하니 그렇게 자주 아프지, 제발 ‘둥글둥글하게 살아라.’라고 이야기하지만 매번 속 끓이는 문제의 중심에 있는 엄마도. 그 모두에게 화가 났다.    

 


모두, 그냥, 닥치고, 꺼져줄래?!    



아빠, 나는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아빠도 알잖아요? 아빠가 긴 세월 얼마나 힘들게 버텨 오셨는지 너무 잘 알지만, 더 이상 아빠의 감정 쓰레받기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아빠의 아내 노릇을 대신할 수 없고, 엄마 탓하며 미워하는 일도 이제는 그만 하고 싶어요. 이번 생애 각자가 짊어진 멍에는 그냥 각자 지고 갔으면 해요. 그러니 술 좀 그만 드시고 노후 생각도 하셨으면 좋겠어요. 평생 힘든 노동 않고 귀하게 사신 분이 말년에 이렇게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도 너무 안타깝지만 인생은 어쩌면 공평한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초년이 너무 힘들었으니 말년은 좀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여하튼 술 드시고는 제게 전화하지 마세요. 엄마랑 이혼하시는 문제는 두 분이 알아서 결정하시고 더 이상 제 의사도 묻지 마세요. 서운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아빠의 감정은 이제 아빠 스스로 돌보시거나 가까운 지인들과 나누시길 바라요. 재차 권해 드린 대로 심리 상담을 받으셔도 좋겠어요.    


엄마, 나도 둥글둥글하게 좀 살고 싶네. 엄마 딸이 예민한 성격은 맞지만 사람들과 크게 부딪힐 일도 없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많지 않아. 물론 육아가 참 힘들긴 하지만 내가 낳은 예쁜 내 새끼이니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근데 엄마의 빚은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아.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엄마 아빠가 내게 베풀어 주셨던 모든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됐어. 항상 좋은 것만 먹이고 입히고, 양질의 교육을 위해 애써 주셨다는 것도 이제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 줄 알게 됐다구. 그렇지만 고군분투하며 버틴 직장생활 내 옷 한 벌 사 입지 않고 알뜰살뜰 아껴 모은 월급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는 심정으로 엄마의 빚을 갚는 데 썼던 일은 그리 온당하게 느껴지지 않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난 좀 이기적으로 살고 싶어. 차라리 아빠 조언대로 땅이나 아파트를 사둘 걸.. 얼마나 후회했던지. 하지만 난 아마 다시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할지 모르겠네. 어쨌건 난 엄마 배에서 난 엄마 딸이니까.

이제와 그 빚은 어찌할 수 없지만, 지금이라도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 경제관념도 갖고 최소한 자식에게 폐 끼치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잖아.


그리고 둥글둥글하게 살란 말은 내 앞에선 하지 말아 주길.. 둥글다 못해 내가 닳아 없어진 것 같은 지경이니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아. 대신 좀 더 이기적으로 살게. 그래야 엄마 딸이 살 것 같아. 앞으로 좀 더 모난 딸이 되더라도 이해해줘요. 모나봐야 엄마의 둘째 셋째 자식들보다 훨씬 마음 여리고 바보 같은 첫째인 거 엄마도 알잖아. 엄마를 미워한 세월이 너무 길지만 그래서 많이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엄마를 미워하지 않아도 됐으면 좋겠어. 그럴 만한 에너지도 내겐 이제 남아 있지 않으니 부디 그랬으면 좋겠어.  

   

여보, 당신에게도 할 말이 참 많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맙다는 한 마디를 먼저 전하고 싶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둘째 아들로 자란 당신이 우리 집에 맏사위로 장가와서는 형부, 매형 소리 들으며 아내의 어린 동생들을 품고 맏이 역할을 나누어 져야 했으니. 착한 딸 콤플렉스가 심한 아내와 그 가족을 껴안고 가는 일이 녹록지만은 않았음을 알아요. 둘째의 대학원 졸업식 날 꼭 참석하고 싶다고 연차까지 쓰고 가족들을 태워 서울까지 장거리 운전을 도맡았을 때도, 막내의 기숙사까지 매번 짐을 실어 나르고 고속도로를 오가던 때도 나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터졌던 엄마의 빚 문제로 함께 마음 쓰고 그간 모은 돈을 보태야 했던 때엔 너무 많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어. 비록 맞벌이를 하던 때였지만 그게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도 잘 알아. 많이 고맙고 미안해. 아마 반대로 시댁 케이스였다면 나는 당신이랑 이혼까지 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으니.    


여보, 근데 나 좀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어. 당신도 그랬겠지만 나 그간 너무 많이 힘들었고, 이젠 좀 내려놓고 싶네. 착한 딸, 착한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너무 많이 애쓰고 산 세월이 억울하진 않은데 이젠 좀 나를 위해 살고 싶어. 내가 이런 말 하면 당신은 또 어이없는 웃음으로 받아칠지도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마누라가 아파 병들어 죽는 것보단 못되고 이기적인 마누라라도 함께 사는 게 백번 낫잖아. 안 그래? 우리 서로 자신을 돌보며 살았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아내가 하는 일들을 잔소리 없이 묵묵히 바라만 봐줘도 난 더 바랄 게 없으니, 돈 버는 일에 아직 게을러도 조금만 이해해줘요. 지금은 돈이 되는 일보다 나를 찾는 가치 있는 일들에 내 에너지와 시간을 쏟고 싶어.

그래도 당신 마누라 아직 능력 있으니까 당신도 힘들 땐 언제든 이야기해요. 영양제만 털어 넣지 말고 짬 내서 제발 운동도 좀 하고. 회사일이 너무 힘들면 언제든 내려놓고 쉬어도 좋아요. 그땐 내가 나가서 뭐든 해볼게.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줍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 자신을 가장 위로해주고 싶은 순간’에 대한 글쓰기 주제가 정해졌을 때, 사실 나는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어느 순간이라고 특정 짓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 힘듦이 이어진 것 같고, 그 힘듦을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내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라 많이 망설였다. 자신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게다. 어쩌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그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 말이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면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그날의 기억’이 툭 비집고 나온 바지 주머니마냥 그렇게 내 안에서 비집고 나왔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어쩌면 수치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을 아무렇지 않은 듯 주섬주섬 주워 담은 글이 나를 토닥토닥 위로해준다.


...

애썼다고,

잘 지나왔다고,

이제 내가 기꺼이 네 편이 되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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