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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Jun 25. 2021

추억은 실수를 싣고

여행의 기억.

2009년, 여름. 나는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을 심지어 홀로 간다는 사실이 설레어 며칠 잠을 설쳤다. 어디에 얼마나 머물렀다가 속히 이동을 해야 여행 참 잘했다고 소문이 날지 루트를 몇 번이고 다시 봤다. 친한 동생에게서 캥거루가 그려진 빨간색의 예쁜 여권 케이스도 선물 받았다. 여행을 향한 붉은 열정으로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늦은 밤, 파리에 도착해 밤하늘의 별을 세며 첫 숙소를 찾아가는 길이 설렜다. 열두 시간 남짓의 비행은 꽤 피곤했지만 돌바닥에 캐리어 돌돌 구르는 소리는 경쾌했다. 실컷 자고 도착해 또 밤을 맞았기에 시차 적응에 다소 어려움을 겪긴 했다. 애써 잠을 자려다 뒤척이다 깊이 자지 못한 나는 다음 날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갖가지 치즈와 햄, 요구르트와 빵, 커피가 진열된 호텔 조식을 들이마시면서 슬슬 파리지앵 모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센 강. 간간이 유람선이 지나가는 세느 강에 부서지는 윤슬을 보며 물멍을 때렸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집은 내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한 평짜리 고시원이었다. 조금 더 싼 곳에서 지내기 위해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창 없는 방에서 지내던 내가 찾아간 세느 강은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세느 강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서 반나절을 머물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전부 다 감상하진 못했다. 모든 작품들이 어마어마했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중에서 파울로 베로네세의 <가나안의 혼인잔치> 그림 앞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가나안의 혼인잔치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그 기적적인 사건은 여흥을 즐기는 귀족과 4중주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하던 하인들만이 목격했다. 더구나 그 사건을 경험하는 하인들은 그림의 오른쪽 귀퉁이 아래,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위치에 놓여있다. 


나는 변방 어느 귀퉁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오늘 주어진 삶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 내는 것 자체가 기적일 수도 있고, 그 순간들이 모여 기적을 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뭉클해졌다. 나는 사실 화가의 의도도 모르고 어떤 목적으로 그림이 그려졌는지도 모르지만 밀려오는 감격에 그만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인파 뒤에 서서 코를 훌쩍이면서 셔터를 눌렀다. 


<가나안의 혼인잔치> 파울로 베로네세


뭉클하고 행복한 순간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홀로 떠난 자유여행의 일분일초가 소중했고 매일 밤 호텔에서 사진을 훑어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런저런 실수도 많았다. 고기가 들어간 피자를 먹고 싶어 주문을 했다가 날 것으로 토핑 된 희한한 피자를 받았다. 일정이 비슷했던 유럽 여행자와 함께 샹들리에 거리를 걷다가, 너무 졸려 눈앞이 흐려지는 바람에 그 화창한 오후에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돌아와야 한 날도 있었다. 유독 그렇게 졸리던 날 밤, 센 강 유람선을 타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프라하에서는 실수를 안 하는 듯했으나, 표 없이 입장하면 안 되는 건물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후다닥 뛰어나오는 일도 있었다. 일주일 간의 여정이 쏜 살같이 지나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검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이랜드, 스코틀랜드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어렵지 않다고, 나는 2012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향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한 친구가 하이랜드 투어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직접 마주한 하이랜드는 절경, 장관 그 자체였다. 좋은 카메라를 가져갔더라면 더 잘 담아올 수 있었으리라. 노팅힐을 찍은 가게도 가보고 하이드 파크를 비롯한 여러 공원도 돌아다녔다. 근위병 교대식도 보고 포트넘 앤 메이슨 티숍에서 에프터눈 티를 즐겼다. 영국에서 보고 싶었던 뮤지컬을 보고 중간 휴식 시간에 맥주 한 잔을 마셨다. 18세 미만이 확실하냐 물어봐 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많은 뮤지컬을 다 볼 수가 없어서 고르고 골라 오페라의 유령과 위키드를 봤다. 후에 한국에서 위키드 내한 공연을 한다기에 런던에서 이미 보고 온 나는 괜스레 뿌듯함을 느꼈다. 


위키드


이번에도 시간은 쏜 살같이 지나갔다. 다행히 이번 여행에서는 크고 작은 실수 같은 것이 없었기에 안도했다. 완벽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내 옆자리엔 금발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Sarah. 나이는 열여섯. 유럽에서 피겨 스케이팅 훈련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 선수의 이름을 꺼내자 대화에 불이 붙었다. 경유지였던 홍콩에 다 와갈 때쯤, 우리는 4시간 정도의 대기시간 동안 함께 홍콩 시내를 둘러보자며 의기투합했다. 


발랄한 십 대 소녀와 홍콩 야경을 즐겼다. 수중에 남은 달러를 탈탈 털어 subway 샌드위치를 사 먹으며 출출한 배를 달랬다. 짧은 눈 호강으로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했다. 공항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소중하게 들고 있던 회색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인생의 퍼즐 한 조각을 유럽에서 찾아온 우리는 유럽에서 보낸 날들의 추억에 함께 젖어들었다.

곧 탑승할 비행기를 기다리며 서점에서 책을 읽던 평온한 순간, 사건이 발생됐다. 잠시 후 화장실을 다녀온 그녀가 울먹였다. 아직 어린 십 대 소녀는 회색 가방이 사라졌노라 울었다. 나는 카트를 재차 뒤졌고 그녀는 화장실을 한 번 더 다녀왔다. 가방도 카메라도 없음을 확인한 후 사라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십 대 청소년을 부둥켜안고 이십 대 청년인 내가 같이 울 순 없었다. 침착하게 공항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들은 우리를 작은 사무실로 데려갔다. 사라는 cctv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비행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아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가방을 찾지 못하고 울면서 헤어지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내 앞에 앉아 있던 못생긴 경찰이 당신이 손댄 것은 아니냐며 무례하게 굴었다. 언짢아진 나는 어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뭉클하고 감격적이었던 여행의 마지막을 이렇게 씁쓸하게 장식하고 싶지 않았다. 

cctv를 보고 온 사라가 돌아왔다. 그녀 옆에 서 있던 경찰은 웃고 있었고 사라는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좋은 소식일 것 같았다. 경찰이 입을 뗐다. 얼마나 공항 구경이 재밌으면 카트에서 가방이 떨어지는데 둘 다 모르고 지나갈 수가 있죠? 하하하하하하. 울어서 빨간 사라는 부끄러워서 더 빨개졌다. 나는 나를 의심했던 경찰을 노려봤고 그는 멋쩍은 듯 눈을 피했다. 가방을 찾아오는 동안 나도 함께 영상을 봤다. 가방이 털썩 떨어지는 순간, 나는 신나게 수다를 떨면서 유유히 카트를 밀고 지나갔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일처리 하나는 완벽하기로 유명한 내가, 나사 하나 빠뜨리고 낄낄거리는 모습이 낯뜨거우면서도 재밌었다. 


곧이어 순찰을 돌던 경찰이 공항 바닥에 나뒹굴던 가방을 들고 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탑승 게이트에서 손을 흔들며 돌아서던 새빨갛고 퉁퉁 부은 사라의 얼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 역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기내에 올라 내 표를 확인해주던 직원이 발권 실수를 했다며 내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같은 좌석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친절하게 내 좌석을 비즈니스 석으로 업그레이드해주었다. 그런 실수라면 얼마든지 해주시라고 말할 뻔했다. 


처음 만난 호주 소녀와 놀다가 홍콩 공항에서 도둑으로 몰린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문득 그때 그 시절이 생각 나 사진첩을 뒤지면 가방을 잃어버리고 엉엉 울던 소녀, 사라가 나타난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실수했던 일들에 웃음 짓는다면 추억이 되었다는 의미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던 좁은 고시원에 살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유럽을 향했던 도전이 자랑스럽다.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우기 위해 떠난 여행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감격하고 언제까지나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함께 나사 몇 개를 풀고 실수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준 사라에게도 고맙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아마 물건을 더 잘 챙기게 됐을지도 모른다. SNS를 통해 해맑게 웃는 사라의 얼굴을 볼 때마다 빨갛게 부은 사라가 겹쳐 보이는 건 비밀에 부친다. 뭐든 잘 해내는 능력자로 사는 것도 좋지만, 귀엽고 소소한 실수들을 자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홍콩 서브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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