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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Feb 17. 2021

화가 날 때면 집이 더럽다고 외친다.

분노의 청소질 끝에 마시는 향긋한 커피의 평화.

사람이 열광하거나 흥분하거나 화가 나거나, 두렵거나 긴장하는 순간, 이 강렬한 감정들은 우리 몸의 시상하부를 자극한다. 자극받은 시상하부는 교감신경을 활발하게 만들고 일종의 태세 전환 스위치인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몸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아드레날린은 간에 비축된 글리코겐과 아미노산을 포도당으로 바꿔 에너지원을 증가시킨다.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압을 올려 심장으로 들어가는 피의 양을 늘리고 근육으로 가는 혈관들은 확장시켜 근육이 자유자재로 잘 움직이게 돕는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드레날린은 싸울 준비를 하라는 신호이거나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라는 명령이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혹은 “야! 튀어!”


‘화’와 ‘분노’는 강렬한 감정들 중에서도 가장 맹렬하고 공격적이다. 다루기도 꽤 어렵고 해소시키기도 어려운 ‘화’라는 감정은 숨기기도 어렵다. 화가 나면 일단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고 호흡이 가빨라지기 때문이다. 넓어진 코 평수로 콧김을 씩씩 쏟아낼 때 손에 뭐라도 쥐고 있다면 저절로 힘이 꽉 들어간다. 그것은 아마도 태세 전환 스위치가 ‘on’으로 바뀌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전투태세로 돌입한 몸은 일단 뭐라도 던지고 부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이 으르렁 거린다. 그런데 진짜 물건을 던진다거나 누굴 때리면 바로 잡혀가니 참아야 한다. 화를 있는 대로 없는 대로 죄다 표출하는 어리석은 짓은 삼가야 한다. 순간의 화에 압도되어 감정대로 움직였다가는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기 십상이다. 화가 나서 온 몸이 달아오른 상황, 그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이성의 끈을 붙들어야 한다. 가슴속에 거대한 화염이 번지고 있을 때 침착하게 소화기 안전핀을 뽑아 불길을 잡는 데 신경 써야 한다. 거룩한 소방관의 사명으로 살지 않으면 초가삼간 다 태우고 만다.





분노의 감정과 같이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데 서툰 나는 화가 날 때마다 집 안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이제 보니 몸이 가만있질 못했던 것은 아드레날린 때문이었다.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도 꽥 질러보고 좁은 거실을 뱅뱅 돌다가도 화가 안 풀리면 마음에도 없는 어리석은 말을 내뱉었다. 남편과 나도 화가 나는 감정을 다루는데 참 서툰 사람들이었다. 나는 토론과 논쟁에 능한 말발이 센 사람이었고 남편은 말싸움에 젬병이라 혼자 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인 사람이었다. 도망 다니는 남편을 쫓아 떽떽거리며 지난한 싸움을 이어오며 살았다.


애당초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 아닌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다는데 나는 내가 얼마나 인내심이 없고 온유하지 못한 지를 결혼하고 나서 더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나와 남편은 시시 때때로 마음에 안 드는 점에 대해 서로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싸웠다. 때로는 근거 없는 시비를 붙이며 안 해도 될 싸움을 한 적도 있었다. 화가 나서 곰인형을 던진 적도 있고,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냉이 치려다가 아차 싶어 소파 위로 날린 적도 있다. 그 와중에 휴대폰 값이 떠오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남편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벽을 쳤다. 뭐라도 때려눕혀야 한다는 아드레날린에 사로잡혀 분노에 솟구친 우리는 크리넥스 휴지곽을 구기며 고함을 질렀고, 고장 나서 버리려던 오래된 청소기를 두 동강 내기도 했다. 내가 순간적으로 휴대폰을 소파 위로 날린 것처럼 남편도 어차피 버려야 했던 청소기를 부순 것이다. 이러다가 정말 값나가는 것 까지 손댈까 봐 무서워졌다. 우리는 거룩한 소방관의 사명을 되새기며 치솟아 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잠재우기로 했다.


화가 나면 마음속이 지옥 같고, 더러운 시궁창처럼 느껴진다.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가눌길 없어 비명을 지르고 싶어 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정말 더러운 곳을 박박 문지르기로 했다. 원래 집안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확 나는 것이기에, 화가 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은 무궁무진했다. 남편과 나는 뚜껑이 열리기 일보직전이 오면 영혼이 탈탈 털린 목소리로 이제 그만 하자를 외치고 각자 청소에 돌입한다.


나는 열 받은 상태임을 티나게 표하며 아이들의 책을 책장 속에 던지듯이 정리하고, 남편은 달그락달그락 그릇이 깨질 만큼 분노의 설거지질을 한다. 각자 물티슈를 뽑아 들고 온갖 구석구석을 닦으며 씩씩거리다 보면 어느새 거실이며 부엌이 반짝반짝 윤이 나기 시작한다. 커튼을 확 젖히고 세탁물을 꺼내 건조기에 넣고 버튼을 on으로 누르고 나면 이상하게 화가 풀렸다.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와 정리된 집안 풍경을 보며 우리는 눈빛을 교환한다. 타오르던 분노의 불길을 끈 탓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럴 때면 남편이 묻는다.


"커피 한 잔 할래?"


화가 났던 마음이 어느새 녹아내렸는지는 알 수없다. 아드레날린의 명령에 충실하게 손에 물티슈를 쥐고 뭐라도 박박 닦으니 내 근육에 돌던 피가 제 소임을 다하고 몸 전체로 흘러들어 간 탓일까. 나는 커피콩을 그라인더에 가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한다. 왜 그렇게 지나치게 화를 낸 걸까 하고 말이다. 향긋한 커피 향을 맡으며 오늘도 부부의 평화를 지켜낸 우리는 머쓱하게 웃기도 한다. 첫맛은 쓰지만 끝 맛은 흑설탕처럼 달콤한 드립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다시 한번 다짐한다. 화가 날 때면 집이 더럽다고 외치자고. 구석구석 먼지들을 박박 닦아내다 보면 더러운 시궁창 같은 우리 마음도 반짝반짝 윤이날 테니 말이다.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집을 어질러주는 아이들에게 감사해야겠다. 너희들 없을 때 엄마 아빠 사이에 한 차례의 폭풍이 휘몰아치다 간 건 영원히 비밀에 부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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