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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Aug 27. 2021

노릇

따뜻한 말 한마디와 상냥한 눈빛 하나면 충분하다.

십육 년 만에 외삼촌을 만났다. 큰 아이가 딸기 바나나 주스를 마시는 동안 외삼촌은 상속 유류분 관련 필요한 서류 몇 가지를 적어주었다. 나는 혹여나 아이가 주스를 쏟을까 봐 컵을 붙들고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간 외할머니를 얼마나 자신이 지극정성으로 모셨는지 열변을 토하던 외삼촌은 당시에 만삭이었던 나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큰아이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가까스로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고 외삼촌이 말했다.      


“그동안 외삼촌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미안하다.”     


사전적 의미로 ‘노릇’은 구실이다. 구실은 역할을 뜻하기도 하고 책임을 뜻하기도 한다. ‘노릇을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밑천들을 활용해 누군가를 돕고 그 도움을 통해 스스로도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 일이다.      


연년생 임신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며 부모 노릇을 막 시작하고 있던 나는 힘들었지만 힘듦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기쁨이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은 풍파 많은 세상을 헤쳐나가는 든든한 방패막이라고 하는데, 그런 큰 존재의 부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던 나는 부모 노릇을 더더욱 잘 해내고 싶었다.     


노릇의 방향은 언제나 타인을 향한다. 엄마 노릇, 아빠 노릇이 자식을 향하고 효자 노릇이 부모를 향하고, 외삼촌 노릇이 조카를 향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릇은 어쩌면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주고받는 마음들의 무게는 공평하게 달아서 정확하게 계산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은 그저 감사함으로 보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노릇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올라서야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직업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노릇을 때려치우겠다’ 라거나 ‘~노릇 지긋지긋하다’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선택하는 일뿐이다. 사랑, 사명, 혹은 소명의 마음으로 이 노릇을 쭉 이어갈지, 아니면 정말로 더는 못하겠다고 때려치울 지.      


마흔 남짓의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나는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딸이었다. 딸 노릇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을 엄마의 장례식을 통해 절실히 체득했다. 상실을 견디는 삶에 적절한 기간은 없다는 것을 엄마 없는 외로운 세상을 견디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잘 견디는 순간과 못 견디는 순간이 씨실과 날실처럼 짜여갈 뿐이었다. 그렇게 아물고 단단해져 가며 사람 구실 제대로 못 하던 인간이 점점 사람 노릇도 하게 되는 것이 삶이었다.      


내가 ‘아지아’라고 부르던 추억 속의 외삼촌이 십육년이란 세월을 건너 낯빛 검붉은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걸어왔다.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빌라 계단을 내려가 1층에 서서 아이와 같이 기다리던 중이었다. 어딘가 빛바래버린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왔고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아마 엄마는 자기 삶의 주인공 노릇 한 번 못 해봤을 것이다. 딸자식들은 자신의 삶을 가져볼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엄마는 중졸로 학업을 마무리하고 나이 차 많이 나는 외삼촌을 업어 키웠다. 적당한 혼처에 적당한 나이에 시집가서 아이 셋을 키울 동안 외삼촌은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공부를 해서 공중보건의가 되었다. 그 모든 과정에 엄마의 보살핌이 크게 한몫했다는 사실쯤은 외삼촌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 바보처럼 살던 나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외가댁 식구들은 단 한 번도 우릴 찾지 않았다.


남남이나 다름없는 외삼촌을 만난 건 이모 때문이었다. 우연히 이모가 병원에서 여동생과 마주쳤던 것이다. 이모는 울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잘 지내라’ 하며 돌아섰다고 했다. 그 후에 여동생을 수소문한 외삼촌으로부터 연락이 오게 된 것이다.


16년이란 길고 긴 세월의 서사를 긴급 속보 전하듯 간단히 추려 전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과일주스에 정신 팔린 큰아이를 챙기며 애써 어색함을 지울 뿐이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외삼촌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이제라도 외삼촌 노릇을 하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다. 태동이 심해 금방 피로해지곤 했던 나는 용건만 간단히 들은 후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외삼촌은 떠나기 전, 내 손에 약간의 돈이 든 하얀 봉투를 쥐여주면서 출산하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내가 준비해 줘야 할 서류 목록을 문자로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외삼촌은 서류고 뭐고 용건은 다 핑계고 정말 다시 예전처럼 지내고 싶어 왔다고 했으나, 나는 그 반대로 느꼈다.


식탁 위에 봉투를 올려 두고 하얀 봉투에 담긴 일말의 미안함을 곱씹었다. 잘 지냈냐는 말에 나는 잘 지내지 못한 적도 많았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나의 엄마를 알고, 엄마의 삶을 잘 아는 어른들이 생각나는 순간이 많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외가댁 식구들과의 좋은 추억들이 생각나는 바람에 종종 그리웠노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행히 마음의 빈자리는 좋은 사람들로 잘 채웠다고 말하지 못했다. 마음속에 요동치는 그 모든 말들을 줄이고 줄여 괜찮다는 말로, 잘 지냈노라는 말로, 긴 긴 시간의 서사를 요약했다.


나는 며칠 후 외삼촌에게 필요한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아쉽게도 원하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큰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의 유산 싸움에 계속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더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더 관계를 이어나갈 호감도 없었다. 나의 조카 노릇은 그쯤에서 끝이 났다. 너무 늦은 안부는 어색하고, 너무 늦은 진심은 퇴색되는 것이었다.

  

준비할 수도 없고 준비될 수도 없는 삶에서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안부를 묻는 일에 인색하지 않고 살아야 겠다. 적어도 내가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누군가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내어줄 마음의 여유 하나 없는 삶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가슴에 여백 하나쯤은 품고 사는 삶을 살고 싶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상냥한 눈빛 하나로도 사람 노릇은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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