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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Aug 18. 2021

그래서 나는 오늘 살아있다

커다란 박스 여러개를 챙겨서 낑낑 거리며 집으로 갔다. 책상이나 침대, 서랍장 따위의 가구는 없었다. 내가 보던 책, 사계절동안 입을 옷들, 가방과 신발 몇 개, 기타 등등이 전부였다. 여동생의 물건들을 두고 내 것들만 빼니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짐은 네 박스 정도 나왔다. 오랫동안 동네에서 알고 지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도와주기로 하셨다. 집 앞에 주차된 아주머니의 차에 박스를 실었다.


짐을 챙기는 나의 모습을 남동생과 여동생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동생은 서운해 하는 듯 했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빠를 쏙 빼닮은 남동생은 내게 쌍욕을 퍼부으며 자기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노라 협박했다. 나는 이 집에 남겨질 여동생 때문에 오래도록 망설였었다. 하지만 누나를 향한 적대감으로 시시 때때로 위협을 가하는 남동생을 나는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를 씨발년이라 부르는 사람은 더 이상 내 동생일 수 없었다. 똑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극복하려 발버둥치고, 누군가는 남을 탓하며 자신의 잘못된 행동들을 합리화 한다.


당시 아빠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묵고, 집에 오면 술에 취해 술주정을 하거나 나를 식모취급 했다. 죽은 아내가 꿈에 나와서 자신을 저승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며 괴로워했다. 할머니는 거금을 들여 우리집 마당에서 귀신쫓는 굿을 벌였다. 아내에게 주먹질 하고 맥주병을 깨뜨려 죽이겠다 위협한 일들에 죄책감은 들었던 것일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고, 뿌린대로 거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엄마는 귀신이 아니라 그립고 보고픈 사람이었다.


아빠와 할머니는 한 팀이었다. 일찍 일어나 아빠와 동생들의 아침상을 차려내지 않는다고 나를 욕했다. 부모가 빚이 있으면 자식이 도와줄 줄도 알아야 한다며 아빠는 시시 때때로 돈을 달라고 했다. 코묻은 돈을 빌려줬고 돌려받은 적은 없다. 아빠의 협박에 어쩔수 없이 연대보증을 섰던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아빠의 변치 않는 레파토리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 아빠가 힘들다는데 돈 한 푼 보태지 말라고 가르치더냐?"였다.  


자기 아들 홀아비 만들었다며 며느리 장례식장에서 상을 뒤엎은 대단한 할머니는 아빠를 위해 거금을 내어주며 외국인 며느리를 사라고 했다. 나는 아빠에게 부탁했다. 재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성급하게 어린 외국인을 만나기보다 천천히 생각해봐 달라고 말했다. 아빠는 자신을 생각해주는 건 할머니뿐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결정에 토 달지 말고 맘에 안 들면 내 집에서 나가라고 윽박질렀다. 부모가 되면 아빠의 마음을 알 거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그 때 느낀 엄청난 위화감은 아직도 소름이 끼친다.


아빠는 나보다도 어린 베트남 여자분을 임신시켜 데려왔다. 어린 나이에 타국에 온 여자분은 자식들을 짐덩이로 여기고 허구헌날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아빠를 보며 내게 서툰 한국말로 참 나쁘다고 말했다. 그 어떤 것에도 책임지지 않는 아빠는 딸 뻘 되는 사람을 배우자로 집에 앉혀 놓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병신같았던 나는 그런 사람들도 내 가족이며, 단지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안 좋은 행동만을 하는 것이라 애틋하게 여겼다. 아빠와 베트남 여성분,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핏덩이같은 아이까지 전부 교회에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렸다. 행복한 가정인 것처럼 가식을 떠는 아빠의 모습이 역겨웠고, 알 수 없는 깊은 수치심에 같이 교회를 가자는 말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줘야 제대로 삶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을거라 믿었다. 아이를 봐주기도 하고, 간식을 사거나 영양제를 사드리기도 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목사님의 딸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중독으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자립하도록 돕는 상담사가 자신의 꿈이라고 했다. 빨리 돈이나 모아서 나를 모르는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고만 싶었던 나는 꿈이랄 게 없었다. 자신감 넘치는 그 친구와 달리 좌절감에 휩싸인 우울한 내 모습을 비교하며 남몰래울기도 많이 울었다. 나도 좋은 아빠를 만났더라면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라며 한도 끝도 없이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음대로 데려가시냐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집에 있던 현금 몇 십만원과 아이를 데리고 홀연히, 새엄마였던 사람이 사라졌다. 아빠는 그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이고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아서 자기 인생이 이렇게 꼬인다며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싸질러댔다. 나는 내 탓이 아닌 일인데도 부끄러웠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예배가 끝난 후 마지막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리 속은 텅 빈 것 같았고, 내 인생에는 해결책이 전혀 없다고 느껴졌다. 그저 멍하니 서 있는 내 곁으로 목사님이 잠시 멈춰섰다. 그 순간이 나는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목사님은 내 어깨를 톡톡 두번 치시며 말씀하셨다.


"괜찮다."


괜찮다. 정말 괜찮다. 나는 정말로 괜찮아지고 싶었다. 정말로 괜찮아지고 싶어서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돼서 정말 속상했다. 자꾸만 안 괜찮고, 너무 버겁고, 힘들기만 했다. 목사님께서 나의 상황을 다 알고서 하신 말은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짧은 한 마디에 목사님께서 나를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셨는지가 전해졌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던 그 날, 나는 많이 울었고, 정말로 괜찮아지기 위해 다시금 힘을 내보기로 했다. 격려받지 못한 영혼에 진심으로 위로를 전해주신 목사님은 몇 년 후 혈액암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 속에 "괜찮다."라는 말로 살아계신다.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던 어느 날, 나는 나를 기꺼이 돕겠다고 하시는 아주머니와 함께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내가 머물게 될 한 평 남짓한 고시원 앞에 차를 세우고 아주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윤미야, 너만 생각하고 살아. 너만. 너가 행복한 삶을 살아."


아주머니께서 우리 엄마와 얼마나 친하게 지내셨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얼마든지 나서 주실 수 있을 만큼 나를 생각해주시는 분이었다. 이런 저런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나의 결정에 대한 서사를 이미 목격해왔고 너무 잘 이해하시는 분이셨기에 지금도 너무나 고맙다. 엄마에게 내가 얼마나 귀한 딸이었는 지 아시는 분이셨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하게 된 독립은 나를 좀 더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힘없이 늘어진 자세로 터덜거리며 걷던 내가 어깨를 펴고 앞을 바라보고 걸었다. 발돋움하는 나를 끄집어 내리며 샌드백 삼아 화풀이하던 사람들이 없어졌기에 나는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때는 단호함도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잘 지내는 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피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참 오래도록 많이 참고 살았다.


나는 늦었지만 사람답게 살기 시작했다. 웃기도 했다. 집도 고시원에서 조금 넓은 방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살았다. 제대로 살아보니, 어떤 것이 잘못된 일이었는지도 더욱 분명해졌다. 내가 느낀 감정, 나의 생각들을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환경 속에서 벗어나니, 새로운 파도가 휘몰아쳤다. 내가 옳았음을 확신하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괜찮다."는 말 한 마디, "너만 생각하고 살아."라고 전하던 간절한 진심이, 죽고 싶었던 인생 하나를 살렸다.

그래서 나는 오늘 살아있다.


하고싶은 일을 포스트잇에 적어 한 쪽 벽에 가득 붙이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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