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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Nov 12. 2021

믿고, 기대고, 사랑한다.

지금 여기서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몇 주 전, 서울로 출장을 갔던 남편은 겸사겸사 잠실에 사는 선배 부부를 만나고 돌아왔다. 돌아온 남편의 손에는 딸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소소한 선물들이 들려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내 취향을 저격하는 간식을 보내주셨다. 하얀 스티로폼 박스 안에 들어있던 떡볶이를 냉동실에 고이 모셔 넣은 후 연락을 드렸다.


남편과 나는 같은 대학을 나왔지만 학과도 달랐고, 동아리도 달랐다.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우리의 동아리 방이 공교롭게도 바로 옆에 붙어 있었기에, 그저 오가며 마주치다 얼굴을 트고 이름을 트고 인사를 텄을 뿐이었다. “누나, 안녕하세요.”하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던 후배와 부부의 연을 맺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각자 다른 사람에게 삽질했던 뜨거운 청춘의 서사를 떠올리면 이제와 우습다.      


보내주신 선물 감사히 잘 받았노라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던 중, 돌아온 답장에 낯이 뜨거워졌다. 선배가 나를 무슨무슨 동아리를 주름잡았던 ‘인싸’라고 소개를 한 모양이었다. 철없이 부끄러웠던 그 때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촤르륵 지나갔다. 돌아보면 이불킥할 일들이 떠올라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나는 그저 시니컬한 프로 불편러인데 이 사실을 말할까 말까 하다가 말해 버렸다. 내 말을 믿지 못하던 언니는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사교적이고 적응력 높고 적당한 붙임성도 있는 인간이기에, 굳이 끝까지 부정하진 않았다.       


잠시 대화를 엿보던 남편은 “남편도 종종 불편해하는 프로 불편러 맞는 것 같은데?”라며 농담을 던지다가 내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를 피해 다른 방으로 신속히 피신했다. 남편이 보는 나, 내가 생각하는 나, 남들이 보는 나, 그리고 내가 어떠한 사람일 것 같다는 이미지까지. 전부 내 존재를 구성하는 파편의 일부들이다. 인간의 존재는 마땅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층층이 다채로운 영역에 속해있다. 한 마디 말로 속단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존재는 계속해서 발산하고 있는 우주와 같다. 그러니 나는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여전사라 해도, 섬세하고 정교한 글을 쓰는 감수성 충만한 예술가라 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단칼에 끊어내는 프로 불편러라 해도, 곳곳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이라 해도, 어떤 측면에서는 다 맞는 말이다.      


동아리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도맡아 이끌어갔던 모습 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착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돌아보면, 일이든 관계든, 건강한 인격체로서 감당했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근한 미소로 방글방글 웃고 있던 가면 뒤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었다. 혐오와 냉소로 내 마음이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잘 몰랐었다.  종종 숨길 수 없이 드러나곤 했던 쓴 뿌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오래도록 걱정하고 잘 지내는지 챙겨봐 주었던 선배들에게 고맙다. 마음에 박힌 쓰디쓴 조각들은 뜨거운 눈물로 씻어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 분들을 통해 배웠다.


정보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적인 틀을 스키마(schema)라고 한다. 부정적인 스키마는 삶 속에서 일종의 “덫”으로 작용한다. 자신을 쓸모없고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스키마는 상대방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열등감과 우울에 빠지게 만든다. 잘못 형성된 부정적인 스키마는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하고, 종국엔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고, 그들과 함께 여러 가지 일들을 성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허무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은 모두 타인을 이용해 먹고 버리는 기회주의자일 뿐이다.”라는 잘못된 스키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덤이었다. 그런 마음으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가 없었고,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말이다.

     

최근 "완전한 행복"을 출간하신 소설가 정유정 선생님의 인터뷰를 봤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빠져들었다. 본인도 자존감이 낮다고 고백하신 선생님은 자존감 낮은 사람들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예민하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애쓰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덧붙여서 집단 전체가 높은 자존감을 추구하고 있는 사회 현상을 의아하게 본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모두 어떤 면에서는 불완전하고, 어느 정도 결핍된 재능을 갖췄으며, 자신이 갖지 못한 행운들을 아쉬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진화해왔다는 그녀의 관점에서는, 살아남는 것에 성공했을 때 얻게되는 부수적인 것이 행복이었다.


누구에게든 적극적으로 다가가면서도 의심과 불안에 휩싸였던 과거를 지나 나는 생존했다. 살아남은 나는 대체로 조용해 보이지만 예전보다 훨씬  뜨겁고 훨씬  행복하다. 나를 역기능하게 만들었던 부정적인 스키마는 기회주의자들을 만났을 때만 작동한다. 내게 주어진 패들이 보잘것 없어 보일 때는 영화 굿  헌팅의 명대사 "It's not your fault." 로빈 윌리암스처럼 3 되뇌어 본다. 내가 이룬 성취들이 하찮아보일 때는 영화 히말라야의 대사를 떠올린다. 어떤 면에서는 불완전하고, 어느 정도의 결핍된 재능을 갖췄으며, 가지지 못한 행운들을 아쉬워하는, 고유한  인간으로서 나는 오늘도 살아남고 싶다. 믿고, 기대고, 사랑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위로 높아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아.
옆으로 넓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마치 바다처럼.
넌 지금 이 여행을 통해서 옆으로 넓어지고 있는 거야.
많은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보고, 그리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니까.
너무 걱정 마.
내가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사람들이 너보다 높아졌다면,
넌 그들보다 더 넓어지고 있으니까.

- 영화 히말라야 황정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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