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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Jan 21. 2022

오늘이라는 계절

당신의 오늘이 참 사랑스럽군요.

고등학교 때 짝지 이름은 김총명이었다. 본명이 총명은 아니었고 열심히 공부하는 태도가 참으로 총명하다 하여 김총명으로 불렀었다. 중간만 하면 된다 생각하고 살던 친구는 뒤늦게 공부할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언어 영역은 상위권을 유지하던 내게 이것저것 참 많이도 물어봤다. 수학 문제를 물어볼 때는 나도 모르게 버벅거리다 노려봤던 것 같다. 설명이 귀찮은 날의 내 십팔번 멘트는 "아, 됐어. 그냥 외워!"였다.


자율학습 시간에 필기를 보여주고 있던 때였다. 잠시 멍 때리던 나는 문득 이해되지 않던 시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물론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외우고, 필기한 대로 답을 쓰면 될 일이었다. 대학을 가려면 성적이 필요했고 내신을 위해서는 알려준 대로 달달 외워야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어깃장이 놓고 싶었다. 정말 교과서에 나온 의미가 맞는지, 이 시에서 시인이 정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 다른 것은 아닌지, 생각이 많아졌다. 정답이 정해져 있던 학교에서 다른 대답은 곧 틀린 답이었던 시절, 나는 교무실에 찾아가 선생님께 묻기보다 간편하게 총명이에게 하소연하길 택했다.


"총명아, 근데 이 시를 왜 이렇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응?"

"굳이 이 단어를 써놓고 뒤에 와서 이렇게 묘사를 하니까 좀 황당한데?"

"야, 뭘 시를 분석하고 있어.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뭐?"

"시가 무슨 수학공식인 줄 아냐. 아, 됐어. 그냥 외워!"


역시 사람은 평소에 잘해야 하고, 옆에 있을 때 잘해야 한다. 내가 수없이 내뱉었던 "그냥 외워!"가 주마등처럼 아찔하게 지나갔다. 어쨌거나 "시"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당시 내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논리적 기승전결 구조를 지닌 비문학이 훨씬 쉽게 느껴졌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시"는 더 적은 말로 더 많은 말을 전달하는 문학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시 속에 드러나는 것은 보통 네 가지인 것 같다. 첫째, 시인이 놓여있는 시대상, 둘째,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 셋째, 시인이 경험한 개인적인 역사, 넷째, 그 속에서 시인이 발견한 의미. 이 모든 것이 시 한 편에 응축된다. 그래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습작과 긴 퇴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태생적으로 천재적인 시인들은 예외다.

 

“시"는 결코 가벼운 감성팔이가 아니다. 비유와 상징, 묘사라는 기법을 통해 전개되는 시는 오랜 여운을 주고 계속 곱씹게 하는 문학이다. 시는 표면적인 의미보다도 내포된 의미가 깊을수록 더 긴 여운을 준다. 그래서 시인은 엄선된 시어를 통해 거대한 의미를 구조화하는 데 도가 튼 전문가라고 볼 수 있다. 식상하지 않은 참신한 은유와 묘사로 시대에 경종을 울리거나 인생 전체를 관조하고 통찰하는 시. 그런 시는 두 번 세 번을 읽게 된다. 좋은 시를 쓴 시인을 동경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수순이다.


"시"는 시를 쓴 시인이 누구냐에 따라 스타일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어떤 소재를 좋아하는지, 어떤 묘사를 잘 쓰는지, 어떻게 색다른지, 주제의식을 던지는 방식이 어떠한 지 등등, 시인마다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재능도 다양하다. 그래서 시에도 색깔과 모양이 있고 특정 시를 좋아하는 "취향"이 존재한다. "시"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좋아하는 시가 다른 것도 그런 이유다. 물론 취향과 성별, 종교와 국적, 나이 등등을 불문하고 모두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명시도 존재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에릭 핸슨의 아닌 것, 사무엘 울만의 청춘, 랭스턴 휴즈의 꿈, 웬델 베리의 최고의 노래, 정채봉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나태주의 풀꽃, 홍시화의 눈 위에 쓰는 겨울 시, 기형도의 안개, 신경림의 나무, 박노해의 아름다운 나이테,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소호의 사과문 등등. 나는 다양한 시를 좋아하는 편이다. 시인들이 내 선생님이고 시들이 내 교과서다. 그런데 가끔 너무 난해한 시들은 소화가 좀 어렵다. 조금 격하게 말하면 별로인 때도 있었다. 불친절한 것이 고차원적인 것일까 고민하기도 했다. 가끔, 문학계에서 찬사 받는 시, 혹은 유명한 상 수상작에서 난해함을 느낄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는 계속 시를 써도 되는 사람일까 의문이 드는 지점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문예지에 “나태주라는 슬픔”으로 글이 실렸었다. 그 글의 요지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예술성, 창조성이 떨어지며, 모두가 공감할만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정서만을 노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그 글이 “이 시대 시문학의 슬픔”이라며 부정적으로 평하는 나태주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글의 논지대로라면 나 같은 독자 역시 이 시대 시문학의 슬픔에 일조한 것일 테다.


문학의 유용함은 독자의 가슴에 와닿아 의미가 생길 때 만들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시란 자고로 유명한 시가 아니라 유용한 시가 진짜 시다.”라고 하신 나태주 시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한 인터뷰에서 나태주 시인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제 시가 대단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해요. 저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제 시는 대단한 시가 아니에요. 그런데 대단한 시라면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해요. 시는 대단하지 않아야 해요. 조그마해야 하고, 쉬워야 하고, 낮아야 하고, 부드러워야 하고, 이미 한 소리를 또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시인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내가 시인인데 덤벼!’ ‘니들이 게살 맛을 알아?’라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 시인인데,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같이 놀아요’가 맞아요.”


너무 어려운 시는 가슴에 와닿는 데 오래 걸린다. 누군가 해석해준 글이나 평론한 글을 보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해되는 것과 감동이 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겹겹이 쌓인 비밀을 파헤치면서 감동을 얻는 시도 물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조금 어려운 시들을 음미하며 받아들여 보려 애쓰다가,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진실을 깨달았다. 내가 애써도 이해할 수 없는 시는 내가 쓸 수 없는 시라는 것을. 나라는 사람의 재질을 말이다.


고차원적이고 의미심장하며 여러 겹의 은유 속에 꼭꼭 숨긴 신비로운 의미를 가진 시, 그런 시가 좋은 때도 있다. 다만 나는 너무 철저하게 숨어버린 숨바꼭질 게임이 너무 어렵다. 시답잖은 시라 하여도, 부끄러움은 내 몫이라도, 나는 머리카락 몇 가닥 보이게 숨고 싶다. 숨바꼭질의 묘미는 찾는 그 순간에 있으니까.  


문학이 좀 더 친밀하게 독자에게 가닿길 바라는 출판사를 만난 건 운명인 것 같다. 나는 우리의 일상 자체가 예술이라 믿는다. 우리의 오늘이 가장 눈부신 계절이라 믿는다. 좀 더 작고, 더 낮은 마음으로, 친근한 소재로 적힌 나의 시들을 용기 내 꺼내본다. 시집에 실리게 될 38편의 시와 10편의 디카시, 5편의 에세이는 전부 "오늘", "지금 이 순간의 계절"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 내 첫 시집의 이름은 ⟪오늘이라는 계절⟫이다. 읽는 분들에게 달콤 쌉싸름한 여운이 남으면 좋겠다. 오늘을 견디는 유용한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내 책을 읽고 수많은 오늘들로 쌓아 올린 인생의 숲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표지 디자인 진행 중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길...


발랄하고 유쾌한 데다 한 미모 했던 짝지 김총명이 지금 어찌 살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시 해석이나 문학 문제가 마음에 안 든다며 딴지 걸던 내가 시집 출간 준비 중이라면 깔깔 웃을지도 모르겠다. 뭐, 인생은 본래 좀 더 살아봐야 아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누군가 그랬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들게 해보고 싶다는 뜻일 때가 많다고.


늘 밝게만 보이던 총명이의 아픈 가정사를 알게 된 날, 어린 마음에 너무 속상했던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본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이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것을 안다. 우린 모두 다 각자 어떤 모양의 아픔을 감당하고 견디며 산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또 다른 총명이들에게 당신의 오늘이 참 사랑스럽다고,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에디터님이 좋다 하셨던 시 한 편을 스포하며 글을 맺고 싶다. 다음 글에서는 완성된 표지를 스포할 수 있길.....


알라딘 - 오늘이라는 계절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업로드 되었습니다.






세 사람의 포옹         


      

웃옷 안주머니 속에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가 있다     


속이 상한 아이가

토라져서 눈물을 광광 흘린다

세상이 떠나가라 운다     


말도 잘 듣고

규칙도 잘 지키고 착하게

다른 친구에게 양보도 했는데     


왜 자꾸 서운함만 주냐고

하늘을 향해 꺼이꺼이 운다

안아줄 어른 하나 없는 것처럼     


슬퍼하면 안아줘야지

뚝 그칠 때까지 달래줘야지

그래야 그게 어른이지 한다     


어른이 된 내가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다른 어른도 우리를 꼭 안아주었다     


부둥켜안은 셋이

편안해질 때까지

세상은 떠나지 않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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