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웹툰 '아홉수 우리들' 주인공에 공감하는 이유
푹 빠져있는 웹툰이 두 개 있다. 꾸준히 미리 보기 결제를 하며 따라갈 정도로 미쳐있다. 그림도 잘 그리는 데다 스토리까지 완벽한 웹툰 작가들이 못내 존경스럽다. 그중 하나가 수박양 작가님의 <아홉수 우리들>이다. 대략적으로는 스물아홉 청춘들의 만남과 헤어짐이지만 그 속에는 제각각의 성장 스토리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연애, 직장, 취업,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아홉수 세 친구들이 제각각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웹툰을 좋아하면서도 댓글란에 댓글을 달아본 적은 없다. 손가락이 근질근질한 적도 있었지만 이미 많은 분들의 댓글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기에 굳이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올라온 159화 미리보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제 멋대로 움직였다. 성급한 이별 후, 뒤늦은 후회 속에서 많은 독자분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주인공 전남친 서사에서 말이다.
아홉수 우리들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서 가장 다정하고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봉우리를 6년 연애 후 어이없게 걷어찬 안 준은 독자들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 대차게 봉우리를 걷어찰 수밖에 없었던 서사가 나온다 하더라도, 뒤늦은 후회로 얼룩져 슬퍼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스러운 봉우리의 뒤통수를 제대로 날려버린 그는 그저 재수 없는 전남친일 뿐이었다.
하지만 후회막심 열차를 탄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덮어놓고 마구 밉지만은 않다. 나는 안 준처럼 6년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그처럼 잘 생긴 부잣집 자제였던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안 준이 가엾다. 공통점이라곤 일도 찾을 수 없는 이 캐릭터에서 느끼는 희한한 동질감은 뭐란 말인가. 사랑과 이별이라는 프레임과,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설정에서 벗어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때문에 찌질하게 슬퍼하는 평범한 청춘 중의 하나였다. 그제야 좀 내 이야기 같아 보인다.
지망했던 대학에 합격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나는 서울권 대학은 별로이니 장학금 받고 울산에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에 아무 대꾸도 못했다. 어차피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고, 내 의견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굳이 겪어보지 않고도 알았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 그 순간이 후회스럽다.
사는 게 버거워 땅만 보고 걷던 시절, 누군가의 고백을 정중히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네 까짓게 뭔데 내 고백을 거절하냐고, 자존심 상한다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욕을 날려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나쁘고 못된 말로 사람을 때리고, 행동으로 타인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끝까지 올곧고 싶었던 나는 자주 부러졌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는 말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었다.
검색창에 “죽기 전에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이라고 입력해보면 많은 글들이 나온다.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한 이야기 속에서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었다.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지 못했던 지난 시간의 후회가 안 준이라는 캐릭터에 투영된다. 준의 안식처였던 봉우리를 마음에 안 들어하는 그의 엄마, 온 힘을 다해 노력해서 이루어낸 준의 성과를 보잘것없게 여기는 그의 아빠, 어떻게든 잘해보려 애쓰지만 업무 성과보다 정치질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직장 생활. 그 모든 악재들을 견디다 못한 준은 모든 것이 버거워 결국, 자신의 버팀목이었고 세상 유일한 사랑이었던 봉우리를 버린다.
아홉수 우리들의 작가는 아마도 안 준과 봉우리를 재결합시키진 않을 것 같다. 다만 작가는 안 준 캐릭터를 통해 누구에게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의 버거운 전쟁터가 한 두 개쯤은 있으며, 가끔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면 지켜야 할 것을 잃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뼈아픈 후회의 길을 걷고 있는 준이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데는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길을 잘 찾기만을 응원하며 생애 처음으로 적어본 댓글이 어느새 베댓에 올랐다.
사랑은 정말 유치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다. 사랑은 그 어떤 미래도 보장하지 않고, 현재 맞닥뜨린 어려움과 난관을 단숨에 뛰어넘을 신박한 해결책 따위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사랑은 3개월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호르몬의 장난일지도 모르고, 배부른 사람들의 낭만적인 감정 놀이일지도 모른다. 핑크빛 감정들이 사라지고 나면 사랑은, 무미건조한 일상을 함께 굴러가는 권태로운 현실 속 의무적인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들만이 "사랑"이란 걸 한다. 용기 있게 사랑한 사람들은 상처받더라도 덜 후회한다. 어쩔 수 없이 후회한다 할지언정, 자기 자신을 다독이며 일어선다. 사랑스러운 차우리, 김우리, 봉우리,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우리들처럼 말이다. 유치하고 초라하고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 사랑 같은 걸로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싶다며, 한없이 유치해지고픈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