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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Jan 12. 2024

[디카시] 생강에게 배우다

새해에 기꺼이


기꺼이,

찌꺼기가 되는 삶을








2024년 갑진년, 청룡의 해다. 마흔이 되었다. 마흔은 불혹이라는데, 나는 종종 이기지도 못할 술의 유혹에 곧잘 넘어간다. 맥주 한 캔을 겨우 마시던 내가 이젠 소주 반 병을 마신다. 언젠가부터 소주가 달았다. 쓰기만 한 술을 대체 왜 돈 주고 사 먹냐는 이십 대의 나는 이제 없다.     


알코올 쓰레기면서도 알코올을 좋아하는 건 모순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순적인 면이 있다. 나 역시 모순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술을 마신다.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별로라서, 설레서, 감사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게 다 허무해서 술잔을 기울인다. 많이 마셔봐야 고작 소주 반 병이지만 말이다.     


그간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시시해지고 사랑했던 것들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요즘, 뭐든 또렷했던 삼십 대의 나도 가고 없다. 마흔이 원래 그런 나이인 것일까. 무덤덤하고 밍밍하게 새해를 맞이해 보니, 열정도 설렘도 생기발랄함도 없다. 분명 여러 가지모양으로 사랑을 하고, 크고 작게나마 사랑을 받고 있는데, 사랑의 맛과 모양과 색깔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을 느낀다.     


어딘지 모르게 지쳤다. 체력을 잃은 것이다. 뭔가를 또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검은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중이다. 열정 넘치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려보니, 현재의 상실감은 그리움을 닮아있다. 지지고 볶으며 10년을 살아온 옆지기와 단란한 가정을 얻고,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낸 두 권의 책을 얻고, 8년을 두 아이 엄마로 살면서 많이 달라진 나에게 적응해 보려 애쓰는 새해 첫 달이다.      


기분 전환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지만, 아이들이 샤샤핑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 덩달아 신이 난다. 지금 나에겐 아이들처럼 뜨겁고, 열정적이고, 순수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지금의 이 따분함과 무료함, 의미 없고 동시에 의미있는 흔들림을 폭넓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진중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실상 이 모든 음주와 우스꽝스러운 가무는 뭐든 잘 하고 싶고, 잘 해내고 싶은 완벽주의 기질 다분한 나의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페이스북에 너도 나도 일출을 찍어 올리던 새해 첫날이었다. 몽골 어느 산자락에서 떠오르는 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몽골의 바람은 어떤 향기일까. 그곳의 흙을 밟고 서면 어떤 느낌일까. 저 정도의 고도에서 귀는 얼마나 먹먹할까. 뒤이어 바닷가에서의 일출도 감상했다. 소금기 짙은 바람과 함께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그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인적 드물고 경치 좋은 곳을 어찌 그리 잘 찾아가시는지, 다들 존경스러웠다.     


나도 배낭하나 달랑 둘러메고 산자락을 홀로 걷고 싶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지금은 아닌 것들을 잠시 먼 미래에 부쳐 둘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삶은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오늘이라는 계절 속에서만 실현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의 오늘을 살 뿐이지 않은가!. 산 속이 아니어도 키보드 앞에서, 바닷가가 아니어도 싱크대 앞에서 나는 나의 지금을 산다.     


울산이 고향이신 작가님과 나누는 늘 반복되는 대화같은 것이 좋다. 마치 미래에 부쳐둔 편지처럼 말이다. 작가님, 그거 알아요? 나 방어진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어머, 진짜요? 언제 울산 한 번 와요. 방어진 바닷가에서 회에 소주 한 잔 해요! 내가 쏜다! 그 이야기가 벌써 몇 번째인 지 모른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하더라도 괜찮은 우리는, 이 대화만으로도 충분한 지점에 머물며, 다정한 마음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것이다.      


아이들의 감기 예방을 위해 생강고를 만들던 날이었다. 갈아낸 배와 생강을 면포에 싸고, 당장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도 꾹꾹 눌러 담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힘주어 짜냈다. 사랑은 마냥 행복하고 설레는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찌꺼기가 되는 편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른다. 삶을 사랑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러하다. 바라지 않고 내어주는 사랑이 기꺼이, 찌꺼기가 되는, 그런 과정 자체가 사랑 아닐까. 진액을 다 바치고 남은 생강 찌꺼기가 말없이 숭고하다.      



허무하고 허망해질 때마다 김남조 시인의 “허망에 관하여를” 읽는다. 허망이란 삶의 예삿일이며, 사람의 식량이라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몰아친다. 행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허망해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사랑의 무게를 깨달은 시인의 초연함에 압도되고 만다.     


사랑한 만큼 돌아오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까. 주고 또 주다 찌꺼기만 남는대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오직 사랑을 위해 포기한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모든 순간에 내가 사랑하기로 택한 모든 것들로 충만할 수 있을까. 허망해질 사랑에 나를 바치기 위하여, 허무한 삶과 허탈한 하루들에게 내 마음을 여는 열쇠를 쥐어줄 수 있을까. 쌉싸름한 냄새를 풍기며 누운 생강 찌꺼기처럼 숭고해질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로 끝난 시에 이미 답이 나와 있어서 다행인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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