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지 않는 독서가 가능할까?
책을 좋아한다.
나의 선호는 어린 시절, 낡고 바랜 전집을 붙잡고 읽던 기억에서 비롯한다. 충청도 작은 시골 마을, 부모님은 늘 농사일에 바빴고 나와 동생은 혼자일 때가 많았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땅따먹기를 하고 줄넘기를 하다 하루의 끝에서 우연히 《대지》를 펼쳤다. 그 속에서 나는 중국 농가의 부엌에 앉아 턱을 괴고 그들의 대화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리고 《노인과 바다》 속, 바다 한복판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외국 노인을 뱃머리 끝에서 응원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찾은 책은 내게 단순한 백지와 활자의 조합이 아니었다. 시골을 벗어나 낯설지만 알지 못했던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였다.
그래서 책을 끊임없이 사며, 곁에 두는 생활을 했다.
오늘날 책을 읽는 인구는 확연히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책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대형 서점의 사인회나 얼마 전 성황리에 막을 내린 ‘서울국제도서전’을 보면 책의 쓰임이 소유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누군가는 읽기 위함이 아닌 ‘갖기 위해서’ 책을 산다. 책을 책장에 꽂아두는 행위가 일종의 자기만족이자 자기 홍보가 된 SNS 트렌드가 한몫한다. 이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옷이나 신발이 배송되면 정작 뜯지도 않은 채 쌓아두는 풍경과 다르지 않다.
고백하자면, 지금의 나는 책을 거의 사지 않는다.
진짜 좋아하는 작가 몇명의 책을 사기는 하나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을 검색하고, 없으면 상호대차를 신청한다. 한두 달을 기다려야 해도 괜찮다. 다만, ‘내 취향대로 주관적인 책을 고르며 공적인 돈을 소비한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희망도서가 대출되어 비어있음을 목격했다. 같은 책을 원하는 또 다른 이의 존재를 확인하며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책은 나만 위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에게 쓰임을 받으며 가장 책다워지는 순간이 오는 걸 느꼈다.
내돈내산 책은 대출기한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시간의 무제한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언젠가 읽는다며 산 책들은 느슨한 관리 속 이리저리 자취를 감췄다.
우리 집은 아이가 태어나며 하나 둘 늘어난 책장은 다섯 개나 됐다. 칸 칸마다 아이 책들이 들어섰고 점점 내 책들은 밀려나 방치됐다. 그래서 나의 책을 정리하고자 지인에게 주고 드림으로 마무리했다.
비워내고 나면 언젠가 다시 채울 줄 알았으나 오히려 반대였다. 책은 더 이상 ‘소유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도달하면 충분한 존재가 되었음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덕분에 책을 소비하지 않아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과 나아가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소비 사회’라 부르며, 인간이 더 이상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만 규정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책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본다. 소비가 반드시 일회적인 소모로 끝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한다. 책을 사지 않고도 읽고, 그 경험을 곱씹고, 글이나 대화로 다시 내보내면 곧 생산이 된다.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현대인의 얕은 읽기를 비판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산만한 독서를 부추기고, 깊은 사고를 방해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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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책을 사지 않는 독서법은 나를 오히려 더 깊이 읽도록 만들었다. 도서관 책은 반드시 반납해야 하기에, 읽는 동안만큼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납 후에는 기록으로, 글쓰기로 이어가고자 했다. 기한이 있던 덕분에 절실함이 생겼고 이는 내 안에 더 오래 남는 이유가 되었다. 소비가 흘러가 버리지 않고, 다시 다져진 후 내 것이 되었다.
돌아보면 우리 삶에서 소비는 피할 수 없다.
다만 소비라는 이름의 행위에 태도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심히 쓰고 흘려보내는 소비는 곧 사라지고 만다. 우리에게 어떠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소비를 곱씹고 나누고 다시 빚어내면 평범한 흙이 도자기로 변하듯, 세상에 없던 가치를 만들 수 있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남기는 건 잠시의 유희와 쾌락일 뿐이다. 하지만 ‘생산적 소비’는 타인과의 연결로 이어지고, 결국은 우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든다.
오늘의 소비가 내일의 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선택이 곧 우리의 철학이 된다. 책을 사지 않는 독서법은 뻔한 절약의 기술이 아니다. 소비를 생산으로 전환하는 삶의 태도다. 오늘의 읽기는 내일의 글을 낳고, 또 다른 독자에게 글이 닿는다면 그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소비의 모습이 아닐까.
책을 통해 지금 생산하는 기록의 역사를 꾸준히 남기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