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진짜 이유

삶의 낯선 각도 속에서 찾아내는 일

by 밝은 미인


며칠 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돌아왔다.
여행을 다녀오면 늘 그렇듯, 일상은 금세 제자리에 있었다. 데스크 위 쌓인 서류와 전화벨, 청소기 소리는

직전 여행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분명한 잔상이 남아 있겠지. 낯선 공간에서의 멈춤은 단순한 휴식 그 이상, 멀찌감치에서 다시 바라보는 하나의 틈이었다.

여행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낯선 장소에 발을 딛는다는 사실보다 그 낯섦 속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좋았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생각이 제자리를 맴돈다. 반복되는 하루가 사고의 범위를 좁히고 무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여행은 그 일상의 뫼비우스를 잠시 끊는 일이다.
끊어짐 속, 비로소 나의 내면이 깨어나 말을 건넨다.

발리의 오전은 유난히 느렸다.
사누르 해변을 걷는 이들의 속도도, 파도의 리듬도 일정했다. 그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아닌 나란 존재의 흐름을 느꼈다. 해야 할 일 대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감각, 그 단순함이 주는 해방감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때조차 나는 쉬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고 아직도 완성형이라 치부하긴 어렵다.

아이들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비행기에 실리는 캐리어차부터, 지나가던 도마뱀,
호텔 근처를 맴도는 고양이와 인도양의 파도까지...
세상의 낯선 것에 대해 흥분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바라본 아이들의 여행은 관찰이 아니라 체험이라 정의했다.


세상을 처음 만나는 눈으로 본다는 건
이미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나는 반짝이는 눈동자 속 여행은 우리가 처음 만나는 세계를 복원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았다.

낯선 환경에서는 사소한 일도 다시 배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시장에서 손짓발짓으로 가격을 흥정하고, 도로를 건널 때 신호보다 사람과 오토바이를 움직임을 읽는다. 불편함이 불안이 아닌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탐험가로 되돌아간다. 여행은 어른의 일상에 묻혀 있던 생의 감각을 다시 꺼내주는 시간이었다.

현지에서 만난 공사판 노동자, 식당 주인, 오토바이 기사 등 인도네시아인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얼굴은 평온했고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들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삶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삶의 균형은 소유가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되는 거란 걸 느꼈다. 여행이 가르쳐 준 건 단순한 그러나 강력한 이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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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본질은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 속에서 완성된다.
거리감이 생기면 우리의 삶이 더 명확히 보인다.
삶 속 어떤 것들이 불필요한지, 어떤 것부터 지켜야 하는지, 판단이 선명해질 때 비로소 삶은 단정해진다.

결국 여행의 진짜 이유는 탈출이 아니다. 쉼을 위한 도피가 아니라, 삶을 낯선 각도에서 다시 읽어내는 일이다. 짧은 단절의 시간 동안 우리는 삶의 언어를 다른 문법으로 번역해 본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같은 일상을 살지만, 삶 속 의미는 이전과 다르게 들린다.

여행은 우리를 다른 사람이 되게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미 어떤 사람인지 그 사실을 잊지 않게 실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