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살아남는가

누구에게나 필요한, 나만의 생존 도구들

by 밝은 미인


삶의 어느 날은 예고 없이 쓰러진다.

기대 속에서 열어 본 ‘불합격’ 메시지, 의사의 무심한 검사 결과, 사랑하는 이의 차가운 이별 통보. 그 순간, 숨이 막히고 세상은 낯설고 두려운 얼굴로 돌변한다. 어디에 발붙일 곳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은 공허뿐이다. 영화 <터널> 속 하정우처럼 무너진 터널 속에서 버티던 그가 가진 건 단 두 병의 생수뿐이었다. 그런데 이 물 두 병이 그의 생사를 갈랐다.


삶도 그렇다. 누구나 힘든 순간을 버티기 위한 ‘생존 도구’는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살게 하는 결정적인 무언가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망설임도 없이 우리를 쉽게 짓눌러놓는다. 다행히 나는 나락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도구를 찾았다. 겉치레나 위안이 아니라, 진짜 나를 살게 하는 것들. 나만의 세 가지 도구는 달리기, 글쓰기, 그리고 명상이다. 삶은 예고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위기가 닥친 순간에 생존 도구를 찾으려 하면 이미 늦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웠다. 그래서 지금은 매일 달리고, 쓰고, 눈을 감는다. 누군가 보기엔 사소한 일상이지만, 이 세 가지는 내 안의 ‘비상키트’가 되어주었다.



1. 몸 : 나는 달린다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두 발이 땅을 박차는 순간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전해진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온몸에 피가 몰리며 심장이 요동친다. 그 절박한 숨결 사이로 세상의 무게가 밀려 나가는 듯한 해방감이 찾아온다. 아이들과 공을 주고받으며 달릴 때, 저 멀리 종점으로 향하는 1호선의 덜컹거림이 귓가에 스친다. 그리고 노을이 서쪽 하늘의 필터를 바꾸어 놓을 때까지. 달리기 속에는 ‘살아 있음’의 원조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달리기는 나의 불안과 무력감을 떼어내고 다시 세워줬다. 누군가 달리기를 삶의 도피라고 말하지만 나는 ‘저항’이라 부르고 싶다. 달리기는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들을 향한 최소한의 반격이다. 등 등을 돌리지 않고 그것들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간다. 숨이 가빠질수록 세상은 느려진다. 그 느림 속, 이어폰 너머 심장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가 내 삶을 다시 정상궤도로 올려놓는다.


2. 마음 : 나는 쓴다

글쓰기는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말이 더 쉽겠지만, 말은 언제나 타인을 전제로 한다. 상대의 표정, 눈빛, 그 뒤에 따라올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글은 내 안의 문을 닫고 나 자신과 마주하게 만든다. 카페의 구겨진 냅킨이라도 꺼내어 몇 줄 적기 시작하면, 마음은 그 글자 위로 옮겨간다. 혼란스럽던 생각들은 문장의 줄 세움 속에서 서서히 정리된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의 정체가 드러나면 ‘이게 뭐라고 그렇게 힘들었을까’ 허탈하기까지 하다.


글쓰기는 마음속 소음을 분리하고, 막연한 두려움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마음 속 숨어 있던 검은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림자의 태그를 붙이고 문장으로 옮기면 더 이상 나를 두렵게 흔드는 괴물이 되지 않는다. 결국 글쓰기는 마음의 혼란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정리하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반복하며 나의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졌다.



3. 정신 : 나는 눈을 감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명상이라 부른다. 하지만 내가 하는 명상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내가 원하는 순간, 조용히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느끼는 일이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생각은 계속 밀려오고, 마음은 금세 산만해졌다. 그럴 땐 내 안의 생각들이 거센 파도처럼 나를 삼켜버린다. 하지만 단순함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본질이 드러난다. 본질은 언제나 단순하고, 명료하고, 깨끗하다. 나는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진다.


명상은 더 가지려는 욕망의 기술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연습이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잠시 멈추고, 나는 다시 숨을 고른다. 단 5분의 정적이 나를 지탱하는 에너지로 바뀐다. 짧은 침묵이 내 하루의 방향을 다시 세운다.



4. 결국, 우리는 무엇으로 버티는가

왜 우리의 인생에는 도구가 필요할까. 답은 단순하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스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작은 실패에도 쉽게 주저앉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버티는 법을 아는 존재다. 포기와 지속의 경계선 위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건 결국 ‘나만의 생존 도구’다. 누군가에겐 나처럼 달리기, 기록, 명상, 또 누군가에겐 음악, 요리, 기도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것의 종류나 형식이 아니라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생존 도구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의식이다. 그 의식을 잊지 않는 사람은 폭풍의 언덕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눈 앞의 호랑이는 점점 고양이로 작아지고, 캄캄한 동굴은 손전등 불빛 아래 작은 방으로 변한다. 회복의 알고리즘을 내재한 사람은 결국 다시 일어선다.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그리고 다시 일어난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는다.

이전 03화오래 남는 건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