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친구가 B친구에게 권했던 소개팅이 성희에게로 넘어왔다. B친구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소개팅은 처음이라 호기심도 있었고, 썩 나쁜 느낌도 없어서 만나보기로 했다. 1994년 여름 어느 날, 스물일곱 살 예쁜 나이에도 바쁘게 사느라 혼자였던 성희에게 마지막까지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분홍색 벚꽃잎이 심장에 토르륵 떨어졌다.
소개팅 당일, 재밌게도 바람맞았다. 연락은커녕 남자의 코빼기도 안 보였다. 대체 얼마나 잘난 놈이길래 약속을 안 지키는 건지 기가 찼다. 시간 약속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하고 확실한 예의다. 하지만 그는 지키지 않았다. 사내대장부처럼 씩씩하게,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겁먹어도 안 먹은 척, 힘 좋은 척 다니다가, 난생처음으로 땡땡이 원피스를 입었는데, 허탕이었다. 어땠냐는 언니들의 장난 어린 물음에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까였어!"
집 전화가 울렸다. 언니들이 그 사람일 거라 말했다. 받기 싫었지만,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나 보자 싶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A친구였다. 차가 너무 막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고, 간신히 자리를 찾았을 땐 성희가 이미 떠난 후라서 미안해한다는 소식이었다. 연락처도 물어봤다고 했다. A친구는 마치 본인이 애프터 신청을 받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성녀는 심드렁했다. 어쨌거나 늦었으니까 만날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했다. 단호한 성희의 태도에 A친구가 당황해 말을 버벅거렸다. 그래도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게 어떻냐는 회유책이 먹혔다. 성희는 마음을 돌렸다.
"그럼 그 사람 번호 줘, 내가 연락하겠다고."
의도적으로 밀당을 하려던 건 아니었으나, 갑자기 바빠진 탓에 연락처를 받아만 두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아쉬울 게 없는 성희 입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 잊고 살았던 거겠지만. 어느 일요일, 오랜만에 휴식을 만끽하다가 책상 위 메모해둔 그의 번호를 발견했다. '심심한데 전화나 해볼까? 날 깐 사람 얼굴이나 보고 오지 뭐.' 그렇게 그와의 만남이 성사됐다.
최고 미남 장동건이나 멋있게 날아다니는 홍콩배우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웬 딸 둘 딸린 아저씨가 앉아 있는 걸 보니 웃음이 파 터져 나왔다. 유행이 뭔지 감도 못 잡고 있는 머리 스타일에, 각진 얼굴형, 까무잡잡한 피부는 눈에 안 들어왔다. 그저 끝이 툭 떨어진 짙은 눈썹과 순한 눈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순박한 성격이 마음으로 와닿았다. 지나가다 마주쳤으면 고개도 안 돌릴 그런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끌렸다. 왠지 이 사람이랑, 결혼하게 될 거 같았다.
데이트는 평범했지만 행복했다. 그는 성희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표를 예매했고, 흉내 낼 수 있는 동물 소리를 따라해 코끼리, 호랑이, 원숭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했다. 더운 여름날 매미가 나무에서 후드득 떨어져 까무러치는 성녀와 손 잡고 다른 그늘로 피신하면서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같이 있을수록 편안했고, 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다음 해, 1995년 4월 8일 봄, 그를 사랑하는 성희와, 성희를 사랑하는 그는 결혼식을 올렸다.